최근 보이스피싱 관련 영화 시나리오를 쓰기 위해 중국 조직원들을 취재하던 영화제작자가 보이스피싱 피의자로 경찰에 붙잡혔다. 영화사 대표인 강모(44)씨는 영화 시나리오를 쓰기 위해 지난 2012년부터 중국 보이스피싱 조직원들을 직접 만나 취재해왔다. 그러던 중 그는 조직원으로부터 “보이스피싱에 사용할 대포폰을 개통해 중국으로 보내주면 돈을 주겠다”는 솔깃한 제안을 받았다.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던 강씨는 국내로 돌아와 지인들 명의로 유령법인을 세운 뒤 법인으로 개통한 대포폰 수백대를 보따리상을 통해 중국 보이스피싱 조직에 넘겼다. 그 대가로 강씨는 총 10억여원을 받아 챙겼다.
최근 급증하는 보이스피싱 사기에 강씨처럼 내국인이 가담하는 비중이 커지고 있다. 경기불황과 취업난으로 경제적 어려움에 처한 이들이 돈벌이 수단으로 보이스피싱을 선택하고 있다는 얘기다.
17일 경찰청에 따르면 올 들어 9월까지 경찰에 검거된 보이스피싱 피의자 중 내국인 비율이 97.6%(2만7,509명)에 달하는 것으로 집계됐다. 2015년 관련 통계가 처음 작성된 이래 역대 최대 규모다. 경찰에 검거된 보이스피싱 조직원 대부분이 모집책·인출책·송금책 등 하위 조직원임을 감안하면 그만큼 내국인이 보이스피싱에 동원되는 사례가 늘어났다는 의미다. 보이스피싱 조직의 입장에서는 내국인의 활용도가 높아지고 있는 셈이다.
보이스피싱 사기로 검거된 내국인들의 영역도 확대되고 있다. 과거에는 주로 내국인이 범행에 사용할 대포통장이나 대포폰 명의자를 모으는 모집책이나 보이스피싱에 속은 피해자의 집에 침입해 현금을 훔치는 수거책으로 활동해왔다. 하지만 최근에는 대포통장에 이체된 피해액을 현금자동입출금기(ATM)에서 인출하는 인출책부터 해외로 빼돌리는 송금책, 해외 콜센터를 관리하는 관리총책까지 범행에 전반적으로 개입하고 있다. 곽대경 동국대 경찰행정학과 교수는 “보이스피싱에 가담한 내국인들은 주로 적발될 위험이 높은 범행에 동원되는 ‘일회성’ 구조가 자리잡은 것”이라고 말했다.
서울지방경찰청 지능범죄수사대 관계자가 보이스피싱 범죄에 이용된 수·발신 인터넷전화기 등 증거품을 살펴보고 있다. 경찰은 지난 9월 중국과 태국·필리핀 등지에 콜센터를 갖추고 저금리 대출을 빙자한 전화를 걸어 피해자 310여명으로부터 68억원 상당을 뜯어낸 보이스피싱 범죄단체 3개 조직을 적발, 86명의 조직원 가운데 71명을 구속했다./연합뉴스
극심한 취업난이 계속되면서 고등학생부터 대학생·취업준비생까지 보이스피싱 범행에 가담하고 있다. 최근 20대 청년들이 중국 보이스피싱 콜센터에 취업해 조직원으로 활동하거나 직원들을 관리하다 경찰에 적발되는 사례가 빈번하게 발생하고 있다. 이들은 단기간 큰돈을 벌 수 있다는 조건을 내세운 보이스피싱 조직의 유혹에 넘어가 범행을 저지른 것으로 드러났다. 10대 청소년들이 보이스피싱 사기 사건 피의자로 경찰 조사를 받기도 한다. 대부분이 카카오톡 등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올라온 아르바이트 관련 게시물을 보고 보이스피싱 조직에 가담한 경우다.
최근 보이스피싱 피해가 급증하는 것도 이와 연관돼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보이스피싱 유형 중 금융기관을 사칭해 피해자와 만나 돈을 가로채는 대면편취형 수법이 증가하면서 전체 보이스피싱 피해도 늘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 올해 11월 말 기준으로 전체 보이스피싱 피해 총 3만1,018건 중 81.4%(2만5,257건)가 금융기관을 사칭한 대출사기형이었다.
경찰 관계자는 “최근 금리 인상, 가계대출 수요 증가를 악용해 금융기관을 사칭해 대출해주겠다며 접근하는 대출사기 수법이 크게 증가하고 있다”며 “피해자와 직접 만나 돈을 건네받기 위해서는 중국동포 등 외국인이 아닌 상대방을 속이기 위해 대화가 능숙한 내국인의 필요성이 커질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곽 교수도 “경기불황과 취업난과 같은 경제적 어려움으로 인해 돈벌이 수단으로 보이스피싱을 선택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는 증거”라며 “국내에서 보이스피싱에 가담하는 비중이 늘어날수록 그 피해도 더욱 커질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최성욱기자 secret@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