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스로 죽음을 선택하는 개체는 인간뿐이다. 무리 수 조절을 위한 생태적인 자살이 동물의 세계에서 있을지언정 사회적 자살은 인간 종이 유일하다. 왜 그럴까. 자살에는 강한 애착이 깔려 있다. 동양권에서 특히 그렇다. 삶의 포기라는 물리적 수단으로 정신적 가치를 지키려는 동기가 강하다. 전 기무사령관인 고(故) 이재수 중장이 이런 이유로 목숨을 끊었다. 안타까운 일이다. 국가로서도 손해다. 학구적이면서도 적극적인 고인이 나라에 기여할 기회가 사라졌으니….
고인의 장례식에 현역 군인이 단 한 명도 참석하지 않았다고 하지만 실은 그렇지 않다. 최소한 몇 명이 다녀왔다. 다만 야박한 현실은 분명하다. 고인이 자연사했어도 문상객의 절대 다수가 예비역이었을까. 우리들의 씁쓸한 자화상을 곱씹을 무렵 죽음과 군인에 대한 다른 뉴스가 귀에 들어왔다. 군인 한 분이 고 노무현 대통령의 자살 직후 개인 분향을 시도하다 찍혔다는 것이다. 육사를 졸업하고 촉망받는 장교였던 그의 군 생활은 그것으로 사실상 끝났다.
상이하게 보이는 두 건의 자살에는 공통점이 적지 않다. 고인들의 선택 동기가 그렇고 망자를 떠나보내는 군인들의 태도가 거의 비슷하다. 노 대통령의 죽음에 직접 조문했던 현역 군인은 기억 속에 없다. 해병 중위 한 분이 예복 차림으로 경남 봉하마을을 찾아 거수경례했을 뿐이다. 그는 예비역이었다. 망자와 조문을 생각하자니 옛 기억이 떠오른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돌아가신 직후 일본의 한 주간지가 이렇게 비아냥거렸다. ‘박정희의 나라, 한국에서 믿기 어려운 일이 벌어지고 있다. 박 대통령에게 충성을 다하던 부하들이 보이지 않는다. 일본 같았으면 적어도 10여명이 따라 죽었을 텐데…. 한국인들은 생각 이상으로 비겁한 민족일지도 모르겠다’.
한국인들은 진정 비열할까. 그렇지 않다고 항변하고 싶으나 증좌는 차고 넘친다. 오직 하나 남은 길은 고치는 것뿐이다. 망가진 우리 사회를 수리할 책임은 어디에 있는가. 두말할 것도 없다. 정치에 그 책임이 속한다. 평생을 ‘우파 철학자, 미국에 관대한 유대인’이라고 평가받았던 여성철학자 한나 아렌트는 명저 ‘인간의 조건’에서 용서와 약속이 인간의 최고 행위라는 구절에 방점을 찍었다. “(용서하고 약속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결코 되돌릴 수 없는 단 하나의 행위에 갇히게 될 것이고, 우리는 영원히 그 결과의 희생자로 남게 될 것이다.”
한국적 정치 현실에서 여야가 서로 용서하고 약속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군가는 해야 한다면 그 일차적인 책임은 여권에 있다. 기대와 달리 여권은 오만하다. 이해찬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장기집권을 강조하지만 그럴 수 있을까. 최근 민주당의 후원으로 치러진 ‘촛불정신과 문재인 정부 개혁 과제 심포지엄’에서는 극단적인 경고까지 나왔다. ‘야당이 자살골을 넣지 않는 한 다음 총선에서 패배한다’ ‘제2의 폐족이 머지않았다.’
여권의 정치적 몰락은 나의 관심권 밖이다. 문제는 우리나라다. 정치의 혼란은 한정된 국가적 에너지를 소진시키기 마련이다. 방법이 없을까. ‘경제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애덤 스미스에게서 힌트를 찾을 수 있다. 생전의 스미스가 ‘국부론’보다 더 애착을 가졌다는 ‘도덕감정론’은 한마디로 ‘공감’에 대한 철학이다. 공감과 타인에 대한 이타적인 양보만이 사회와 국가의 발전을 이끈다던 스미스의 관점에서 우리는 과연 몇 점에 해당될까.
우리에게는 과제가 있다. 스미스의 도덕감정론에 따르면 인간은 누구나 허영에 빠질 만큼 나약하고 공감할 수 있을 능력을 가질 정도로 현명하다. 나약함을 추진동력으로 삼고 현명함을 제동장치로 사용하며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느냐에 우리의 미래가 걸렸다. 올해의 달력도 몇 장 남지 않았다. 새해에도 올해와 같은 혼란이 계속될까 두렵다. 정권이 손을 놓았다고 하지만 괴물로 변해버린 법원과 검찰·기업이 어디로 튈지도 가늠하기 어렵다. 대통령께 간청드린다. 부디 말하시라. 정치 행위의 첫 번째인 언어부터 보다 아름다워지기 바란다.
상대가 용서를 바라는지, 약속을 할지를 구실로 내세운다면 실망이다. 넬슨 만델라와 김대중 대통령이 척도를 가지고 죄를 재단했는지 생각해보자. 포용국가론을 주창하고 북한과도 대화하는 마당에 국내 정치에서는 얼마나 포용력을 갖고 있는지 모르겠다. 새해에는 죽음도 아집도, 복수가 사라지고 용서와 약속, 생명의 에너지가 넘치기를 소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