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신용자에 1조 대출·상시 빚 탕감..또 모럴해저드 부추기는 금융당국

내년 신용 7~10등급 대출상품 출시
소액연체자 지원도 제도화하기로
중신용자 역차별·대출 부실 우려 속
재원도 금융사 상시 출연금으로 조달


제도권 금융을 찾기 힘들었던 신용 7~10등급 저(低)신용자들을 위해 연간 1조원 규모의 정책 대출 상품이 내년 출시된다. 또 올해 일회성으로 실시 됐던 장기소액연체자 지원을 제도화해 1,000만원 이하 10년 이상 연체자는 자격 요건만 갖추면 빚을 탕감받을 수 있게 된다. 돈을 빌리는 문턱이 낮아지는 동시에 빚을 탕감받는 절차까지 쉬워지는 셈이어서 정부가 저신용 차주의 ‘모럴해저드(도덕적 해이)’를 부추기는 것 아니냐는 지적이 나온다.

금융위원회는 21일 ‘서민금융지원체계 개편 태스크포스(TF)’ 최종회의를 열고 이 같은 내용의 서민금융체계 개편안을 발표했다.

이날 개편안은 그동안 신용등급이 낮아 금융 사각지대에 놓여 있었던 저신용자들을 지원하는 내용이 핵심이다. 이에 따라 과거 연체 이력이 있거나 현재 빚을 연체하고 있는 신용등급 7~10등급의 저신용자 412만명이 이번 대책의 수혜를 입을 것으로 전망된다. 금융위는 이들을 대상으로 연간 1조원 규모의 서민금융 상품을 출시해 연간 17~18% 안팎의 금리로 돈을 빌려주되 성실 상환시 매년 1~2%포인트씩 금리를 인하해줄 방침이다.


문제는 이들 저신용자에게 무턱대고 자금을 빌려줬다가 제때 상환이 이뤄지지 않을 경우 대규모 정책 대출 부실이 일어날 수 있다는 점이다. 금융권의 한 관계자는 “신용등급이 낮다는 것은 그동안 돈을 갚지 않아 문제를 일으켰던 적이 있다는 것이고, 이런 사람에게 돈을 까다롭게 빌려주는 것은 금융 건전성을 지키기 위한 기본원칙”이라며 “정부 차원에서 이들에게 복지 지원을 확대하는 것도 아니고 아예 전용 대출 상품을 출시해 시스템 안으로 끌어들이겠다는 발상은 이해하기 어렵다”고 꼬집었다.

금융위는 이 같은 지적에 대해 상환 계획과 의지를 종합적으로 따져 대출 여부를 심사하면 부실을 줄일 수 있다는 입장이지만 차주의 상환 의지와 같은 정성적 요인을 금융기관들이 어떻게 객관적으로 평가할 수 있겠느냐는 우려가 벌써부터 제기된다.

이번 대책을 통해 채무감면제도가 확대된 것도 모럴해저드를 부추길 소지가 있다는 분석이다. 정부는 연체 차주에 대한 채무(원금) 감면율 상한을 현재 60%에서 70%로 확대하는 한편 상시 채무조정지원제도를 도입해 연체 발생 전이라도 원금이나 이자를 감면받을 수 있도록 할 방침이다. 또 변제능력이 없는 1,000만원 이하 소액연체자에 대해서는 3년 동안 원리금을 성실히 갚으면 나머지 빚 전액을 탕감하는 ‘특별감면제도’를 도입할 계획이다. 이는 올해 일회성으로 실시 됐던 장기소액연체자 지원제도를 상시화하는 것이다. 윤창현 서울시립대 교수는 “정부가 시장에 ‘힘들면 돈 갚지 마세요’라는 메시지를 던져 모럴해저드를 부추기는 것으로밖에 받아들일 수 없다”며 “정부가 시장에서 파급력이 큰 대책들을 잇달아 쏟아내고 있어 우려스럽다”고 말했다.

그동안 어렵더라도 성실히 빚을 갚아오며 신용등급을 유지해 온 중(中)신용자와 빚 갚기를 포기한 저신용자 사이에 역차별이 발생할 수 있다는 점도 문제로 지목된다. 금융위는 4~6등급 중신용자들이 주로 이용해온 금리 10.5% 이내 서민금융 상품인 햇살론과 새희망홀씨대출의 금리를 단계적으로 중금리(16% 내외) 수준까지 끌어올릴 계획이다. 민간 금융상품 이용이 가능한데도 정책금융을 이용하는 중신용자들이 많아 저신용자들이 20%대 이상 고금리 시장으로 내몰리고 있다는 지적에 따른 것이다. 하지만 이 같은 정책에 따라 중신용자들이 저신용자보다 오히려 더 높은 금리로 돈을 빌려야 하는 상황이 발생할 수도 있다. 특히 중신용자 중에는 그동안 금융거래 이력이 없어 카드나 캐피털 등 고금리 상품을 이용하다 서민금융 상품을 찾는 차주가 많았는데 이들이 가장 큰 불이익을 받을 수 있다는 전망이 나온다.

특히 정부는 단 한 푼의 예산도 없이 이번 서민금융체계 개편에 필요한 재원을 금융회사들로부터 조달하기로 했다. 기존 저축은행과 상호금융업권만 연간 1,000억원가량 출연하던 것을 내년부터는 은행 포함 전 업권에서 연 3,000억원을 상시 출연하는 것으로 변경했다. 정부는 당초 서민금융지원에 2,200억원의 예산을 투입하는 방안을 검토하다 국회 예산 심의 과정에서 반려됐다. 시중은행의 한 관계자는 “돈 갚을 능력이 없는 사람에게 돈을 빌려준 원죄가 있으니 출연금을 내놓으라는 게 정부 논리”라면서 “금융기관의 손목을 비틀어 저신용자에게 돈을 빌려주겠다는 정부의 ‘자가당착(自家撞着)’ 아니냐”고 말했다.
/서일범·손구민기자 squiz@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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