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7년에 제작한 185㎝ 높이의 천주교 서울대교구 혜화동 성당의 ‘성모상’/권욱기자
크리스마스 분위기가 서울 종로구 혜화동 성당으로 이끌었다. 들썩이지 않아도 왠지 달뜨는 시기인지라, 성당을 지키고 선 차가운 화강암 석상도 조금 웃고 있는 것만 같다. 본당으로 올라가는 계단 양쪽에 놓인 조각가 최종태(86)의 ‘성모상’과 ‘요셉상’이다. 1997년에 작업한 성모상의 높이는 185㎝, 남자 어른 만한 키다. 둥근 얼굴에 뜬 듯 감은듯한 겸허한 눈매의 성모상은 여느 성모마리아와 달리 친근하다. 소녀 같기도 하고 엄마 같기도 한 포용력이 단순하기 그지없는 저 동그란 얼굴에 다 담겨 있다. 순수한 얼굴과 단출한 옷차림이 어우러진다. 미켈란젤로 스타일의 성모상에 익숙한 탓이려나. 가장 성스럽고 아름다운 모습으로 그려지는 성모상들과 비교하자면 너무나 소박하다. 최종태의 ‘성모상’은 신상(神像)이 흔히 갖는 공허한 풍요로움을 버리고 ‘고귀한 단순함’을 택했다. 선으로 그린 눈, 그 선이 불룩 솟아 이룬 코. 종교 조각이 그 신령스러운 힘을 유려한 옷주름으로 즐겨 표현하는 것과 달리 이 성모상은 주름없고 담백하다. 꾸밈 사라진 자리에 정신성만 남았다. 매끈한 뒷모습도 머릿수건, 윗옷자락 뿐 아무것도 없다. 없는 것이 아니라 숭고함으로 가득 찬 형상이다. 두드러지는 것이 있다면 얼굴보다 더 큰, 꼭 모은 두 손이다. 전 인류를 위해 기도하는 손은 차가운 돌로 만들어졌지만 따뜻한 온기를, 다 끌어안을 듯한 넉넉함을 전한다. 선(線)만 슥슥 그어 만든 그 손과 맨발이 정겹다.
최종태의 서울 혜화동성당 ‘성모상’ 세부. /사진=권욱기자
이곳 혜화동 성당에서 약 2㎞ 정도 거리, 시간만 넉넉하다면 걸어서도 닿을 곳에 길상사가 있다. ‘무소유’로 유명한 법정스님이 창건하고 입적한 바로 그 길상사 입구에 성모상과 꼭 닮은 ‘관음보살상’이 중생을 맞이한다. 지긋한 눈매에 가슴을 향해 올리고 모은 손, 장식을 모조리 제거한 단아함이 성모상의 쌍둥이 같다. 자비의 상징인 관음보살은 불교의 여러 성상 중에서도 가장 화려한 부처 중 하나다. 원래는 중성적이었으나 송(宋)나라 때부터 여성화 된 이미지로, 아기를 안은 모습이 자주 보이곤 했다. 머리에 성스러운 화관(花冠)을 쓰고 손에 구원의 정병(淨甁)을 들었을 뿐 이 관음상 역시나 소녀 같기도 하고 어머니 같기도 한 얼굴이다. “땅에는 나라도, 종교도 따로따로 있지만 하늘로 가면 경계가 없다”는 게 원로 조각가 최종태의 나직한 설명이다.
최종태의 성북동 길상사 ‘관음보살상’ 세부‘ /사진=권욱기자
최종태는 1932년 대전에서 태어났다. 검소하지만 누추하지 않고 화려하지만 사치스럽지 않다고 한 ‘검이불루 화이불치(儉而不陋 華而不侈)’의 백제 미감을 그의 작품에서 떠올리게 된다면 아마도 고향 탓이리라. 원래 그는 문학소년이었고 시인이 되고팠다. 중학교 2학년 때 미술교사였던 이동훈 선생님을 만나기 전까지는. 봄날 밖으로 나가 사생을 하고 들어왔더니, 다음 날 교실 뒷벽에 그림 하나가 걸렸다. 미루나무 두 그루를 그린 최종태의 그림만 뽑힌 것을 계기로 ‘미술’이 그의 관심사로 들어왔다. 마침 그 해 대전에 있던 미국 공보원 주최 학생미술전람회가 열렸고 전체 2등을 한 것이 한 사람의 운명이 바꿔놓았다.
서울대 미대에 입학한 최종태는 1960년 대한민국미술전람회(國展)에 출품한 ‘서 있는 여인’으로 당시 장관상을 수상하면서 본격 작가 행로가 시작된다. 깎지 않고 조각하는 ‘불각(不刻)의 미’를 추구한 김종영, 그리는 행위를 최소화하고 한평생 ‘나는 단순하다’ 이야기 한 장욱진이 그의 스승이었다. 그들에게 배웠으나 동시에 그들에게서 벗어나야 했던 최종태는 치열한 고민의 시기를 보냈고 1967년에는 불경 공부에 빠져들었다. 귀의할 불당을 못 찾아 방황하던 그에게 친구가 천주교를 권했고 하루아침에 가톨릭 신자가 됐다.
1980년 한강 성당을 시작으로 1983년 서울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1989년 명동성당과 연희동성당에 이어 대치2동 성당과 목동성당 등지의 성상을 그가 조각했다. 작가가 평생을 두고 수 백 점 깎은 성모상 중에서도 가장 애착 갖는 것은 1991년 인천 가는 길 소래의 성 바오로 피정의 집에 모신 높이 350㎝ ‘성모자상’이다. 혜화동 성당의 성모상과 마찬가지인, 둥근 얼굴의 어머니가 아들을 품에 안은 모습이다. 개방된 여느 성당과 달리 수녀원이 운영하는 피정 공간이라 대중적으로 덜 알려진 편이다. 그런 최종태의 성모상은 바티칸 교황청에까지 전해졌다. 가톨릭 신자인 문재인 대통령이 프란치스코 교황을 면담하면서 건넨 은은한 옥빛 성모상이 바로 최종태의 작품이었다.
불교에 몰입했고 관음보살상을 보고 감동해 성모상을 만들기 시작한 최종태는 고(故) 김수환 추기경에게 이따금 얘기하곤 했다. “관음보살이 여성의 이미지입니다. 언젠가 그 관음을 만들 거예요, 언젠가는. 그렇다고 저를 파문(破門·신도를 종교에서 제명함)하시지는 않으실테죠?” 그랬더니 김 추기경이 일본 나가사키 박물관의 ‘마리아 관음’ 이야기를 들려줬다. 400여 년 전 일본에 처음 천주교가 전파된 시절, 에도 막부의 극심한 박해를 받던 나가사키 지역 신도들이 성모상 대신 관음상을 앞에 놓고 기도했다. 덕분에 주변 사람들이 불교 신자로 여겨 박해를 피할 수 있었다. 모시는 신(神)의 겉모습이 뭐가 중요하겠나, 내 마음이 그 가르침을 따르면 되는 것이니.
그 얘기가 법정스님의 귀에까지 들어갔다. 잘 알려져 있듯 ‘바보’ 김수환 추기경과 ‘무소유’의 법정스님은 종교를 초월해 교류했던 사이다. 법정스님이 서대문구 연남동의 작업실을 겸한 최종태의 집으로 찾아왔다. “그 관음상 우리 길상사 이 자리에 세웁시다.” 뛸 듯이 기쁜 마음을 애써 진정시키며 스님을 보낸 작가는 곧장 작업실로 들어가 정신없이 흙을 주물렀다. 그날 오후 느즈막히, 여느 작업 시간과 비교하자면 단숨에 관음상이 완성됐다. “수 년간 머릿속에 생각해 오던 것이라 흙에 손대기 무섭게 만들어졌다”고 작가는 회고했다. 스스로 종교 간의 벽을 허문 조각가는 “예술도 종교도 다 한 덩어리, 다 합쳐졌다”고 말한다.
2000년에 제작한 180㎝ 높이의 서울 성북동 길상사 ‘관음보살상’/권욱기자
조각가 최종태는 한평생 여성을, 소녀를 깎고 다듬었다. 이성으로서의 여성이 아니라 ‘이상’을 향한 아름다움을 여성에게서 발견했기 때문이다. 그가 제작한 남성 조각은 혜화동 성당에서 성모상과 짝을 이루는 요셉상을 비롯해 예수상, 김수환 추기경 조각과 3살짜리 손주 흉상 정도가 고작이다. 한결같은 그의 여인상들은 대체로 정면을 응시한다. 이런 ‘정면성’은 태양신의 아들을 자처한 이집트 왕의 조각이 갖는 특징이기도 하다. 경직된 자세로 정면을 응시한 이집트 왕족은 사사로운 감정에 휘둘리지 않는 절대 권력자, 신에 가까운 사람임을 보여줬다. 하지만 최종태 조각의 정면성은 권위가 아니라 정직이다.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고스란히 보여주고자 그의 여인들은 둥근 맨 얼굴을 반듯하게 드러낸다. 살짝 돌려 빼지도 않는다. 그런 최종태가 네모난 옆얼굴을 만든 적 있다. 1980년대의 일이다. 이른바 ‘도끼형 여인’ 연작인데, 납작 눌린 도끼 모양의 얼굴에 눈코입의 흔적만 드러낸 여인상이다. 무덤덤한 것 같으면서도 처연하고, 보는 이에 따라 신경질적이다고 평가하기도 하는 작품이다. 작가는 나무·대리석·청동 등 다양한 재료로 이 ‘얼굴’ 연작을 만들었다. 그 시절 최종태는 스페인의 프랑코 독재에 저항해 고국에 돌아가지 않았던 첼리스트 카살스(1876~1973)가 “스페인에서는 새도 피스(peace) 피스라고 절규하며 운다”라며 ‘새들의 노래’를 연구했다는 얘기를 종종 하곤 했다. 반민주 사회에 대한 울분, 사방에서 몰아치는 억압의 분위기가 납작한 인물상을 이끌어냈다. 그때 속내를 털어놓던 이가 선배 화가 윤형근이었다. 윤형근은 광주민주항쟁 소식을 접하고는 마당에 털썩 앉아 섬뜩한 검정색으로 무너져내린 듯한 기둥을 그리기도 했다. 최종태의 납작한 ‘얼굴’은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 야외조각전시장, 종로구 평창동 가나아트센터 입구 등지에서 만날 수 있다.
최종태의 1985년작 ‘얼굴’. 억압적인 시대상을 반영하는 이 작품은 일명 ‘도끼형 여인상’이라고도 불린다. /사진제공=국립현대미술관
단순함 속에 보편성을 구현하며 조각으로 시(詩)를 쓴 최종태의 사람에게서 보통 사람의 향기가 맴돈다. 신성한 종교도 하나일진대 사람이 어찌 하나 될 수 없겠는가. 더불어 사는 삶이 더욱 간절한, 한 해가 저물고 있다.
/조상인기자 ccsi@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