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워치] 디지털에 밀려…사그라든 특수

스마트폰 일정 관리 보편화 되며
연말 대목에도 인쇄골목엔 발길 뚝
"그나마 있던 은행주문도 많이 줄어
안 좋은지 오래됐는데…다 끝났다"

충무로 인쇄골목./송은석기자

서울 을지로3가역 8번 출구에서 조금만 발길을 옮긴 후 왼쪽으로 방향을 틀면 탁상용 달력을 진열한 가게들이 한두 곳 보이기 시작한다. 골목으로 조금만 들어가면 건물마다 ‘OO사’ ‘XX인쇄’ ‘△△프린트’ 등의 이름을 단 간판이 눈에 띈다. 건물마다 살짝 가 있는 금, 검은 때가 잔뜩 낀 간판들이 마치 한 입으로 ‘이 골목은 수십 년은 그대로인 곳’이라고 이야기하는 듯하다. 멀리 을지로1가 방면으로 보이는 마천루는 이 골목과 대비되는 풍경이다. 이곳은 서울시에서 가장 오래된 인쇄 골목이자 달력 제작·거래가 가장 활발한 인현동 1가다.

서울경제신문이 인현동 1가를 찾은 것은 크리스마스 이브인 지난 24일 오후. 성탄절 전날이라는 것이 무색하게 골목은 조용했다. 달력을 찾으러 온 손님들은 물론이고 주민들의 대화 소리조차 거의 들리지 않았다. 간간이 들려오는 인쇄기 소리가 적막을 뚫을 뿐이었다. 몇몇 상점 앞에는 버려진 종이와 골판지가 놓여 있었는데 잿빛 건물 사이에 쌓여 있어 그런지 사뭇 을씨년스러워 보였다.

달력을 전문으로 취급하는 한 점포에 들어가자 벽에 크고 작은 달력들이 즐비했다. 이곳 주인인 박병선(가명)씨는 기자를 보자마자 “다 끝났다”는 말부터 꺼냈다. 그는 “경기가 안 좋아 올해 수요가 20~30%는 줄었다”며 “그나마 전통적으로 은행의 주문이 많았지만 올해는 이마저도 없다”고 토로했다. 박씨에 따르면 트렌드도 거의 그대로다. 박씨는 “올해에도 숫자판 달력이 전체 수요 중 반 이상을 차지했다”며 “주문제작 맞춤형 달력도 물량이 매우 적은데다 비중도 그렇게 크지 않다”고 딱 잘라 말했다. 이 업계에서 숫자판 달력이란 큰 종이 한 장에 바둑판 모양의 금을 긋고 1일부터 말일까지 적어놓은 12장짜리 벽걸이 달력을 말한다.

인현동 1가에서 팔리는 달력의 가격은 대체로 1,000~2,000원 사이. 숫자판은 1,000원, 탁상용 달력은 1,300원 수준이다. 마진율은 주문 물량, 달력 유형에 따라 천차만별이지만 대략 10~15%선이다. 비용에는 기계가동비, 종이 원자재비 등이 들어간다. 당연히 주문량이 많을수록 마진율이 올라간다. 소위 말하는 ‘규모의 경제’다. 통상 달력 대량주문의 기준점은 ‘1만부’다. 그러나 인현동 1가에서 대량주문을 한 건이라도 따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충무로 인쇄골목./송은석기자

20년 넘게 인현동 1가에서 인쇄물 후가공을 해왔다는 김영철(가명)씨는 기자와 만나 “이쪽 업종이 서서히 죽어가고 있다는 얘기가 나온 건 오래됐지만 올해는 더 안 좋은 것 같다”며 “옛날에는 달력에 모양도 내고 그랬는데 올해는 영등포 모 생보사에서 일감 하나 들어온 거 빼고는 일이 없다”고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옛날에는 한창 달력을 찍어내는 9월부터 11월 사이에 정신이 없었다”며 “그때는 밤이 돼도 가게마다 불을 밝혔었는데 요즘은 저녁이면 모두가 문을 닫는다”고 말했다. 김씨 옆에 있는 인쇄기에는 먼지가 쌓여 있었다.


인현동 1가가 인쇄 골목으로 자리 잡은 것은 일제강점기 때다. 근처 충무로에 영화산업이 발달하면서 영화 홍보 전단지를 생산하는 업체들이 들어섰다. 이후 인현동 1가에는 영화 전단지는 물론이고 선거 포스터, 달력, 판촉물 등 각종 인쇄물을 취급하는 인쇄소들이 우후죽순 늘어나기 시작했다. 요즘은 다이어리 위주의 물건을 취급하는 상점들이 주류라는 게 인현동 1가 사람들의 전언이다.

2010년 인현동 1가로 왔다는 송현숙(가명)씨는 “내가 인쇄 골목에서 막내”라고 소개했다. 달력을 판매하고 있기는 하지만 주로 취급하는 품목은 다이어리다. 다이어리를 찾는 수요가 그나마 많기 때문이다. 송씨는 “최근에 인현동 1가로 들어온 업체 중 대다수가 다이어리 매장 아니면 아크릴 집”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찾는 손님이 적은 것은 다이어리도 마찬가지다. 송씨는 “아무래도 사람들이 회의나 일정관리를 모두 휴대폰으로 하다 보니 다이어리를 찾는 사람이 적을 수밖에 없다”며 씁쓸해했다.

달력산업 쇠퇴에는 스마트폰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스마트폰 하나로 일정관리와 날짜확인까지 가능하니 달력을 찾는 사람들이 줄어든 것이다. 여기에 대량 합판인쇄로 원가를 낮춘 업체들이 등장하자 인현동 1가에는 가뜩이나 없던 달력 일감이 더욱 줄어들었다.

전통적으로 인현동 1가의 영세 인쇄업자들은 독판인쇄로 제품을 찍어내고는 했다. 독판인쇄란 한 인쇄판에 한 인쇄물을 만드는 방법이다. 하지만 성원애드피아처럼 합판인쇄로 대규모의 인쇄물을 찍어내는 업체들이 생기면서 저가경쟁이 심각해졌다. 합판인쇄는 한 인쇄판에 여러 인쇄물을 찍는 방법으로 단가를 낮출 수 있다는 게 장점이다. 성원애드피아는 단가를 낮춰 일감을 쓸어담았고 인현동 1가는 물론이고 충무로 4가와 성수동까지 지부를 확장했다. 다른 인쇄업체들도 합판인쇄에 뛰어들었지만 대규모 설비를 갖추지 못하면서 가격경쟁에서 도태됐다. 1989년부터 인현동 1가에 있었다는 이춘수(가명)씨는 “성원애드피아 같은 대규모 합판인쇄 업체 때문에 피해를 입은 곳이 많다”고 말했다.

충무로 인쇄골목./송은석기자

그럼에도 인현동 1가에는 독판인쇄를 고집하는 사람들이 남아 있다. 비록 독판인쇄는 합판인쇄에 비해 가격경쟁력이 떨어지지만 한 판에 하나의 인쇄물을 찍어낸다는 점 때문에 품질은 더 좋다. 합판인쇄를 할 경우 여러 데이터를 한 판에 담아야 하기에 색 번짐 등의 문제가 생길 수 있지만 독판인쇄를 하면 원하는 용지·색상에 따라 맞춤형 인쇄가 가능하다. 특히 달력을 독판인쇄로 찍게 되면 각종 사진이나 문구를 삽입할 수 있어 ‘맞춤형 달력’을 만들어낼 수 있다.

이곳에서 20년 넘게 달력과 다이어리를 취급하는 윤호영(가명)씨의 경우 독판 달력이 전체 달력 판매량 중 절반을 차지한다고 말했다. 그는 “독판인쇄가 성공하려면 디자인·생산설비가 모두 갖춰져야 한다”며 “요즘 달력이 어렵다고 하지만 저희 업체에서는 독판 달력 주문이 꾸준히 들어오는 편이라 희망을 갖고 있다”고 말했다.
/심우일기자 vita@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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