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재숙 문화재청장 /송은석기자
대담=문성진 문화레저부장(부국장)hnsj@sedaily.com
“그간 문화재청이 천덕꾸러기처럼 ‘개발의 걸림돌’로 여겨져왔는데 이제는 문화재를 지역사회의 발전을 이끄는 ‘산업 역군’으로 바꿔야 합니다. 집 지으려 땅 팠더니 문화재가 나오는 바람에 모두 멈추게 됐다고 한숨 쉬는 일도 이제는 매장 유구 예측역량을 키우고 발굴 관련 보상을 늘려 개선할 것입니다. 문화재청이 지자체와 공동으로 문화재를 활용해 주민에게 편익을 제공하는 방안 역시 확대할 계획입니다. 근대문화유산을 간직한 군산·목포·영주에 벌써 붐이 일고 있어요. 역사적 상징공간을 지역 활성화의 명품 공간으로 재탄생시키는 시범사업을 추진했는데 이는 문화재와 지역이 공존하는 미래지향적 정책인 한편 역사문화자원을 기반으로 한 지역경제 활성화까지 기대하게 합니다.”
청장으로 임명된 지는 4개월 남짓이지만 문화전문기자로 30년간 활약한 ‘문화통’이자 문화재 활용이 삶에 다가설 방안을 줄기차게 탐색해온 그답다. 정재숙(57·사진) 문화재청장은 최근 서울 종로구 국립고궁박물관 내 청장실에서 진행된 서울경제신문과의 인터뷰에서 “문화재에 대한 관심과 자긍심은 문화재에 쉽고 편하게 다가설 수 있고 다양한 가치를 직접 체험할 수 있을 때 높아진다고 생각하기에 그간 건별로 점(點)처럼 진행되던 문화재 활용사업을 공간별로 묶어 개발하는 사업을 통해 문화재가 지역 주민들의 생활에 이롭고 경제에 도움이 되는 모범 사례를 만들 것”이라며 이같이 밝혔다.
지난 8월 말 문화재청장으로 임명된 후 정 청장은 ‘10·4선언’ 남북공동행사를 위한 방북단의 일원으로 평양에 다녀왔고 뒤이어 한글날에는 세종대왕의 영릉으로 깜짝 참배에 나선 문재인 대통령을 안내했다. 국정감사 와중에는 국회 문화체육관광위원회 소속 여야 의원들과 강원 철원군 비무장지대(DMZ)를 방문해 후삼국 시대에 궁예가 세운 태봉국 철원성의 유적을 짚어봤으며 조선의 비밀병기였던 ‘비격진천뢰’가 무더기로 발굴되자 전북 고창까지 한달음에 달려갔다. 지난달 말에는 아프리카 모리셔스 포트루이스까지 날아가 씨름이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이자 남북 공동 등재의 최초 사례로 이름을 올리는 것을 지켜봤다. 스스로 “내 별명은 ‘이동중’”이라 할 정도로 광폭 행보를 한 나날들이다.
“문화재청의 관할 영역이 우스갯소리로 육해공을 아우르고, 기상청 다음으로 방대한 면적을 다룹니다. 70년 분단의 역사를 뛰어넘는 것이 5,000년의 문화재이며 그 모든 것을 압도하는 것이 자연경관이건만 그 경관까지도 다 ‘문화유산’이어서, 문화재청 업무의 중요성을 뼈저리게 느꼈습니다. 그래서 더욱 국민과 함께 가는 문화재 행정이 중요합니다.”
취임 일성으로 ‘문화재에는 휴전선이 없다’고 했던 정 청장은 DMZ의 복원이 독일 베를린 장벽 못지않은 인류의 문화유산이 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그는 “DMZ에 산재한 문화재 현황은 문헌과 사진자료 등 간접적으로 파악된 것이어서 전반적인 조사가 필요하다”며 “현재 DMZ 내 지뢰 제거 작업은 철원성과 약 10㎞ 떨어진 전사자 유해발굴 시범지역에 한해 진행됐고 ‘태봉국 철원성’ 공동조사는 남북 군사당국 간 합의를 통해 안전보장 등 군사적 보장대책이 마련된 후 협의를 통해 추진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완급조절에 신경 쓰는 사업은 개성 만월대 공동발굴도 마찬가지다. 정 청장은 “만월대 공동발굴은 2007년부터 시작돼 정권과 상관없이 꾸준히 이뤄져오다가 2015년에 중단됐지만, 올해 남북 간 합의로 제8차 공동발굴이 재개돼 남북을 합쳐 60여명의 조사단이 함께 발굴하고 유적 현황을 조사하고 있다”면서 “현장을 다녀온 전문가들이 평양 같은 대도시와 달리 속살이 그대로 살아 있으니 우리가 실패한 도시계획의 전철을 밟지 않도록 했으면 좋겠다고 조언했다”고 말했다. 개성 만월대는 고려 말 홍건적의 침입으로 소실돼 600년 이상 방치됐음에도 남북 공동발굴을 통해 궁궐 주요 건물지와 관련 유물들이 양호한 상태로 지하에 보존된 채 모습을 드러냈다. 글자가 적힌 기와 등 다양한 기와, 국내에서 확인된 바 없는 특이한 형태의 청자가 출토됐으며 2015년 발굴에서는 금속활자 한 점이 출토되는 등 성과를 거뒀다. 정 청장은 고려를 주제로 한 공동문화행사에 대해 “북측은 내년이 개성 도읍 1,100주년이라 개성 만월대 혹은 고려 전반을 주제로 양측에 축적된 고려에 대한 종합적 전시 및 토론을 제안한 상태”라면서 “예정된 북미회담으로 잘 풀리면 그런 것도 할 수 있을 것”이라며 기대감을 드러냈다.
‘역사덕후’인 문 대통령은 공교롭게도 정 청장 취임 직후 세계문화유산인 창덕궁에서 인도네시아 대통령을 맞아 궁궐에서의 첫 국빈 공식 환영식을 열었다. 이에 대해 정 청장은 “중국은 자금성에서 공연도 하는데 (우리는 그러지 못하는 상황에서) 대통령이 먼저 제안해 주셔서 감사한 일”이라며 “정부가 국정과제로 선정한 가야사 복원은 그간의 고대사 연구가 삼국에 치중됐던 것에 대한 반성인 동시에 영남과 호남의 화합이자 벽허물기를 위한 계기가 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복원한 문화재를 적극 활용하는 프로그램으로 현재 궁중문화축전, 창덕궁 달빛기행 등이 있으며 지역에 산재한 문화재들은 문화재 야행, 생생문화재사업, 향교서원 및 전통산사문화재 활용 프로그램 등으로 일반 국민과 접점을 늘려가고 있다.
한편 해묵은 숙제로 꼽혀온 국보 제285호 ‘반구대 암각화’의 보존 방안도 실마리가 잡혔다. 대표적 선사 유적인 반구대 암각화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고래잡이 모습을 비롯해 선사인들의 생활과 풍습·정신세계를 이해할 수 있는 중요한 기록물이 있어 그 가치를 인정받아 2010년 1월 세계유산 잠정목록에 등재됐다. 하지만 수위가 오르내릴 때마다 암각화가 물 속과 물 밖을 오가며 치명적으로 훼손될 위기에 처해 심각한 문제로 지적됐다. 이 지역의 사연댐 수위를 해발 52m 이하로 낮춰 암각화가 물에 잠기지 않게 하는 것이 보존을 위해서는 최선의 방법이나 이렇게 댐 수위를 낮추면 울산시의 식수가 부족해지기 때문에 그간 난제로 남아 있었다. 이는 올 10월 문화재청, 환경부, 낙동강 물 문제 관련 지자체가 참석한 총리 간담회를 통해 낙동강 통합 물관리 방안과 구미산단에 적용할 수 있는 최적의 폐수무방류 방안에서 울산시 물 문제를 해결하고 반구대 암각화는 수위를 낮춰 보존할 수 있게 합의하는 쪽으로 가닥이 잡혔다. 정 청장은 “물 문제와 문화재의 충돌 사안인데, 낙동강 수질개선 용역으로 물 문제가 해결되는 상황을 면밀히 주시하는 동시에 울산시와 문화재청은 적극적인 상생협력으로 반구대 암각화의 세계유산 등재와 주변 관광자원화를 추진해 반구대 암각화가 지역 발전의 원동력이 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할 것”이라고 밝혔다.
무가지보(無價之寶)로 불리는 ‘훈민정음 상주본’ 문제에 관해서도 정 청장은 해법을 모색 중이다. 간송 전형필이 1940년 안동 진성이씨 가문에 기와집 열 채 값을 주고 샀다는 국보 제70호 훈민정음 해례본 못지않은 가치를 지닌 것으로 알려진 ‘상주본’은 2008년 7월 경북 상주의 배모씨가 그 존재를 공개해 알려졌다. 배씨는 골동품업자 조모씨에게서 입수한 것이라고 주장했지만 조씨는 상주본이 도난됐다는 취지로 물품인도 청구소송을 내 대법원으로부터 소유권을 인정받았다. 2012년 사망한 조씨는 생전에 상주본 소유권을 문화재청에 기증했고 이로써 상주본은 국유가 됐으나 정작 실물은 배씨만 알고 있는, 이른바 ‘상주본 은닉 사건’이다. 이에 대해 정 청장은 국정감사에서 “만약 배씨가 자진해서 상주본을 국민의 품으로 돌려주시면 최초의 문화재 발견자로서 명예회복을 할 수 있는 방안을 검토하겠다”고 할 만큼 해결에 적극적이다. 정 청장은 “민간단체에서 중재하겠다고 나섰고 민간 모금을 통해 배씨와의 적정선 협상을 진행 중인 것으로 안다”면서 “문화재청은 유물이 안전하고 빠르게 돌아오는 것을 바라는 만큼 협의를 도울 예정이어서 어쩌면 새해에는 좋은 결과를 전할 수도 있을 것”이라고 희망을 내비쳤다.
마침 내년은 문화재청 개청 20돌이 되는 해다. 정 청장은 스무 살 성년식에 걸맞은 문화재청의 역할로 문화재 보존과 개발 수요의 갈등 완충, 국민 문화 향유권 신장을 동시에 강조했다. “얼마 전 창덕궁의 대조전과 희정당을 개방했습니다. 고종과 순종의 변기와 세면대를 만져보고, 그들이 거닐던 카펫, 내리비추던 샹들리에를 원래 모습 그대로 만날 수 있습니다. 100년 전의 궁 생활을 고스란히 보면서 근대에 들어온 외국문물이 어떻게 우리와 섞였는지를 확인하는 과정 속에 궁이 스스로 살아나는 느낌입니다. 미래의 우리 아이들이 이 궁에서 무엇을 볼지 상상하면 문화유산은 과거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며 오늘날의 우리와 대화하면서 직접 느끼고 체험해 삶을 역동적으로 만들어가는 현재이자 미래임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정리=조상인기자 ccsi@sedaily.com 사진=송은석기자
She is
△1961년 서울 △1980년 무학여고 졸업 △1985년 고려대 교육학 학사 △1987년 성신여대 미술사학 석사 수료 △1987년 평화신문 △1988~1995년 서울경제신문 △1995~2002년 한겨레신문 △2002년 중앙일보 문화부 기자 △2008년 중앙일보 문화데스크 △2012년 JTBC 스포츠문화부장 △2012~2018년 중앙일보 문화전문기자 △2013~2018년 국립현대무용단 이사 △2014~2018년 문화재청 궁능활용심의위원회 위원 △2018년 8월~ 문화재청 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