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운동과 대한민국임시정부 출범 100주년인 2019년 ‘1월의 독립운동가’로 유관순(1902년12월~1920년9월) 열사가 뽑혔다.
충남 천안에서 5남매 중 둘째 딸로 태어난 열사는 1918년 4월 이화학당 고등과 1학년에 진학했고 이듬해 3·1운동이 발발하기 바로 전날 고등과 1학년 학생들과 시위 결사대를 조직해 만세시위에 참여하기로 맹세했다.
3월1일 탑골공원을 나온 만세시위대가 학교 앞을 지나자 열사는 5명의 결사대 동지들과 함께 시위에 동참했다. 같은 달 5일 열사는 동지들과 함께 서울에서 전개된 최대의 시위인 남대문역 만세운동에도 참여했다.
학교가 문을 닫게 되자 열사는 고향에서 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마음먹고 3월13일 사촌 언니인 유예도와 함께 독립선언서를 가지고 귀향했다. 열사는 4월1일 병천면 아우내장터 어귀에서 밤새 만든 태극기를 나눠주면서 만세운동에 참여하러 모여드는 사람들을 독려했다. 시위 대열이 아우내장터 곳곳을 누비자 병천 헌병주재소의 헌병들이 달려와 총검을 휘두르며 만세운동을 탄압하기 시작했다.
열사의 아버지 유중권은 “왜 사람을 함부로 죽이느냐”고 항의하다가 일제 헌병의 총검에 찔려 순국했고 이를 본 열사의 모친도 남편의 원수를 갚으려고 달려들다가 일제 헌병에게 죽임을 당하고 말았다.
이에 열사는 군중을 이끌고 병천 헌병주재소로 달려가 항의시위를 계속했다. 그날 저녁 열사와 유중무, 조인원·조병호 부자 등 시위 주동자들은 체포돼 천안헌병대로 압송됐다.
천안헌병대에서 갖은 고문을 받으면서도 열사는 처음부터 끝까지 자신이 시위 주동자라고 말하면서 죄 없는 다른 사람들을 석방하라고 호통치기도 했다.
서대문 감옥으로 이송된 후에도 온갖 탄압과 고문에 굴하지 않고 옥중에서 지속해서 만세를 불렀다. 특히 1920년 3월1일 3·1운동 1주년을 맞아서는 수감 중인 동지들과 함께 대대적인 옥중 만세운동을 전개하기도 했다.
이로 인해 지하 감방에 감금돼 무자비한 고문을 당했다. 고문으로 방광이 터지는 중상을 입었으나 치료를 받지 못한 채 고문 후유증과 영양실조로 1920년 9월28일 서대문 감옥에서 열여덟 살의 꽃다운 나이로 순국했다. 정부는 열사의 공훈을 기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권홍우기자 hongw@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