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의 눈] 비망록 남기는 공직사회

경제부 한재영 기자


“정권 바뀌면 이슈될 일이다. 시간 순서대로 써둬라.”

신재민 전 기획재정부 사무관은 지난 2일 새벽 생중계한 유튜브 방송에서 선배 서기관이 자신에게 비망록을 쓰도록 한 사실을 공개했다. 비망록 작성을 지시한 사람은 “기재부에서 슈퍼우먼으로 불리는 분”이라고 했다. 자신은 쓰지 못했지만 “다른 사무관은 썼다”고 말했다. 기재부 엘리트 공무원조차 넘치는 세수에도 ‘정무적 판단’을 이유로 적자국채를 발행한다는 게 뭔가 께름칙했던 모양이다.


말이 비망록이지, 알리바이를 만들라고 한 것과 다름 아니다. 적자국채 발행이 다음 정권에서 문제로 떠오를 경우 실무자들이 책임을 뒤집어쓸 것 같으니 ‘위에서 시켜서 했을 뿐’이라고 주장할 수 있도록 해두라는 것이다. 문제가 될 수 있음을 직감한 선배 공무원의 난데없는 비망록 작성 지시는 위법한 것도, 비난의 대상도 아니다. 오히려 생존 본능이 작동한 결과일 것이라는 점에서 수긍이 간다.

그러나 문서 하나를 주고받더라도 기록이 남는 공직사회에서 왜 굳이 비망록까지 남기라고 했는지는 고민해 볼 문제다. 여기에 최근 공직사회 분위기가 잘 녹아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들은 문재인 정부 들어서 앞 뒤 가리지 않고 진행된 적폐청산 작업을 목도했다. 지난 정권에서 윗선 지시를 받아 성실히 업무를 수행했던 동료 공직자들이 정권이 바뀌자 돌연 적폐로 몰려 청산해버려야 할 대상이 돼버렸다. 문화·예술인 블랙리스트 작성에 관여한 문화체육관광부 실무 공무원들이 줄줄이 옷을 벗거나 좌천됐고, 역사교과서 국정화 시도에 연관됐던 교육부 실무 직원들도 수사 의뢰 대상이 됐다.

정권 차원에서 행해진 적폐 몰이의 살기를 온몸으로 느끼다 보니, 공직사회는 이제 고질적인 보신주의를 넘어 숨죽여 비망록을 써둬야 하는 지경까지 이르렀다. ‘나만 옳다’며 정의를 독점한 정권이 행한 적폐청산 작업이 공직사회를 꽁꽁 얼어붙게 만든 셈이다. 결국 공직사회의 복지부동은 더 심해질 것이고, 책임질 일은 아예 거들떠보려 하지도 않을 것이다. 승차공유(카풀) 같은 논쟁적 사안에 대해서는 ‘내가 실무 담당자일 때는 절대 안 된다’는 식의 생각은 확신으로 굳어질 게 뻔하다. 등 떠밀려 하더라도 알리바이 꾸미는 데 노력을 아끼지 않을 것이다. 요즘 젊은 공무원들 사이에서 “도대체 영혼을 가지라는 건지 갖지 말라는 건지 모르겠다”는 말이 나오는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이런 분위기에서는 국가 미래를 좌우할 소신 정책이 나오기 어렵다.

공직사회에 불어닥친 적폐청산의 칼춤이 과연 누구를 위한 것인지 알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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