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WHO-새 일왕 오르는 나루히토]아버지 따라 평화주의? 아베식 국수주의?...기로에 선 日왕실

건강상 이유로 퇴임 아키히토 이어
장남 나루히토 5월1일 왕위 승계
現 '헤이세이' 이을 새 연호도 발표
해외선 평화주의 신봉자로 알려져
일왕 실권없지만 '국민통합'선 구심점
아베 우경화 움직임에 제동건다면
집권 자민당과 불편한 동거 불가피
아베 압박 못이기면 군국주의 속도


“약간 수줍음을 타지만 괜찮은 인물.”

영국 정부의 공문서를 저장·관리하는 국립공문서관이 지난 2017년 1월 기밀 해제로 공개한 외교문서에 적힌 나루히토(59·사진) 왕세자에 대한 영국 외교부의 평가다. 이 문서는 나루히토 왕세자가 영국 유학 중이던 1984년 2월에 기록된 것으로 마거릿 대처 당시 영국 총리가 런던 인근 별장에서 연 오찬회에 23세였던 그를 초대했을 때 참고자료로 총리에게 보고했던 것이다. 문서에는 그가 “테니스를 무척 좋아하고 비올라와 첼로 연주를 즐기는 낭만적인 사람”이라고 돼 있다.

올해 이 ‘수줍고 낭만적인’ 왕세자를 새로운 왕으로 맞이하는 일본열도가 신년 벽두부터 시끌벅적하다. 2016년 아키히토 현 일왕이 건강상의 문제를 내세워 재위 30년을 끝으로 선위하겠다고 선언함에 따라 나루히토 왕세자는 오는 5월1일 왕위를 공식 승계한다. 즉위일이 공휴일로 지정되면서 일본은 올 4월 말부터 5월 초까지 사상 최장인 열흘간의 연휴를 보내며 그에 앞서 4월 중에는 ‘헤이세이’를 이을 새 연호가 발표된다. 세계에서 유일하게 왕의 연호를 사용하는 일본에서는 새 일왕 체제의 시작과 함께 정치·경제·사회 등 곳곳에서 많은 변화의 전환점을 맞으며 역사의 새 페이지가 열리게 된다.


새로운 일왕의 성향은 일본 국민들은 물론 전 세계적으로도 초미의 관심사다. 현 아키히토 일왕의 아버지인 쇼와의 히로히토 일왕은 중일전쟁과 2차대전을 승인해 전 세계를 전쟁으로 몰아넣은 최종 책임자였던 반면 아키히토 일왕은 재위 30년 동안 전쟁 반대와 평화헌법 지지 의사를 거듭 밝혀온 인물이다.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전쟁 가능한 일본’의 부활을 위해 개헌을 추진하는 가운데 차기 일왕이 국수주의적 마인드를 갖는다면 아베 총리의 군국주의 행보에 날개를 달아주는 꼴이 된다.


그런 면에서 나루히토 왕세자는 아버지와 같은 평화주의의 신봉자로 알려져 있다. 아키히토 일왕과 마찬가지로 나루히토 왕세자 역시 일본 우익과 군국주의 전쟁의 상징인 야스쿠니신사를 한 번도 참배한 적이 없어 일본 극우주의자들의 반감을 사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실제 그는 2014년 아베 총리의 개헌 움직임에 대해 “지금의 일본은 평화헌법을 기초로 쌓아올렸고 앞으로도 헌법을 지키는 입장에 서서 조언을 얻으며 일에 임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해 보수진영의 불만을 샀다. 이러한 역사의식 덕에 해외의 새 일왕에 대한 외교적 평가는 긍정적이다. 워싱턴포스트(WP)는 “나루히토 왕세자는 아키히토 일왕을 대신해 왕실 외교업무를 맡아왔다”며 “앞으로도 일본 왕실과 한국 등 태평양전쟁 피해국과는 순탄할 것”이라고 평가했다.

다만 바로 이런 점 때문에 나루히토 왕세자는 즉위 후 일본의 집권 정치세력과 불편한 관계가 불가피해질 것으로 보인다. 집권 자민당은 공공연히 자신들에게 우호적인 왕위 계승 서열 2위 아키시노노미야 왕자가 왕위를 물려받아야 한다고 주장해왔다. 공적인 명분은 남자에게만 왕위를 물려줄 수 있는 일본 왕실에서 외동딸을 둔 나루히토 왕세자보다는 아들이 있는 아키시노노미야 왕자가 왕위를 계승하는 것이 타당하다는 논리다. 여기에 마사코 왕세자빈이 왕실생활에 적응하지 못하고 우울증의 일종인 ‘적응장애’ 진단을 받았음에도 왕세자가 이를 방관해 일본 왕실의 체면을 깎아내렸다며 퇴진론을 제기하기도 했다.

하지만 일본 언론들은 자민당의 ‘왕세자 끌어내리기’와 관련해 나루히토 차기 일왕의 존재감이 아베 정부에 커다란 부담이 되기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일왕이 2차대전 패전을 계기로 실권 없는 상징적 지위만 유지하고 있지만 국민통합이라는 면에서는 여전히 구심점으로서 큰 힘을 가진 것이 사실이다. 국민적 신뢰가 높은 나루히토 왕세자가 우경화 움직임에 반대 의견을 강력히 피력한다면 그가 새 일왕으로 즉위한 후 개헌을 포함해 아베 정권의 일방통행식 우경화 움직임에 제동이 걸릴 수밖에 없다고 니혼게이자이신문은 분석했다. 하지만 그가 평화주의자라고 해도 권력 없는 상징적인 지위 때문에 아베 정권의 정치적 압박을 이겨내지 못할 경우 일본의 우경화에 속도가 붙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서구 역사학계에서는 쇼와 일왕 역시 우경화한 군부에 휘둘려 군국주의에 가담했다고 보는 견해가 많다.

나루히토 왕세자와 아베 정부의 관계 설정은 4월로 예정된 연호 발표에서 가장 먼저 가늠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일본 연호는 2차대전 이전에는 일왕이 스스로 정했지만 1976년 연호법 제정 이후 내각 수반인 총리가 결정한다. 이 때문에 일각에서는 군사강국을 꿈꾸는 아베 총리가 일본을 전쟁 가능한 국가로 정당화할 명분이 담긴 연호로 일왕을 압박할 것이라는 관측이 나온다. 현재로서는 나루히토 왕세자의 앞길이 순탄치만은 않아 보인다. 아베 정권은 일왕의 지위를 일본의 상징에서 ‘일본국의 원수’로 변경하는 헌법 개정을 추진하려 한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일본이 제국헌법(1889년) 시절로 되돌아가려는 꼼수”라며 “실권이 없는 나루히토 왕세자가 우경화 세력에 둘러싸인 포로가 될 신세”라고 꼬집었다.

외신들은 나루히토 왕세자 즉위 이후 일왕과 아베 정부의 관계 설정은 그가 평화주의자로서의 목소리를 얼마나 높이느냐에 달렸다고 보고 있다.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는 “일본 우경화의 중심에는 ‘천황제’가 있고 일부 우익세력이 이의 상징인 일왕을 우경화에 악용하려 한다”며 “차기 일왕이 뚜렷한 역사의식을 바탕으로 기존 정치세력의 억압에 굴복하지 않고 자신의 행보를 보일 수 있느냐 여부가 일본의 군국주의 부활을 좌우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한편 개혁적이고 소탈한 성격으로 알려진 나루히토 왕세자의 즉위로 시대의 흐름과 함께 일본 왕실의 변화에도 가속도가 붙을 것이라는 관측이 제기된다. 현 미치코 왕비에 이어 평민 출신으로 왕비에 오를 외교관 출신 마사코 왕세자비가 적응장애를 극복하고 왕비로서 어떤 역할을 하게 될지도 주목된다. /이현호기자 hhlee@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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