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업통상자원부가 석유화학·철강·자동차부품 업계에 수출압박 전화를 한 시점은 지난해 12월20일께다. 관세청이 같은 달 1~20일 수출입 현황을 공개했던 시점과 일치한다. 당시 1~20일 수출액은 313억달러로 전년 동기 대비 1% 증가한 것으로 집계됐지만 반도체(-9.8%), 액정디바이스(-34.4%) 등 주요 품목의 수출이 크게 쪼그라든 상황이었다. 지난해 한 번도 마이너스로 내려간 적이 없던 반도체 수출마저 감소세로 돌아섰다는 집계가 나오자 시장에서는 12월 전체 수출실적이 마이너스로 돌아설 것이라는 우려가 팽배했다. 일자리와 투자 등 경제지표에 일제히 ‘빨간불’이 들어온 상황에서 나 홀로 ‘역대 최대’ 실적을 냈던 수출마저 무너지면 경제위기론이 걷잡을 수 없이 커질 수 있다는 우려가 작용했고 결국 정부가 업계 독려에 나선 것이다.
정부의 독려는 공식문서가 아닌 전화를 통해 이뤄졌다. 업종별 협회와 주요 대기업들을 대상으로 다음달 수출실적을 앞당겨 그달 실적을 올릴 수 있는 방법까지 제시했다. 철강 업계의 한 관계자는 “대대적으로 수출실적을 홍보하는 보도자료를 내려고 한 건지 급하게 수 통의 전화를 받았다”며 “지난해 수출이 사상 최초로 6,000억달러를 기록했다는 신기록에 집착하는 것 같은데 결국 다음달 실적을 당겨서 이달 실적이 좋아지면 다음달 실적이 줄어들어 경제지표 개선에는 큰 의미가 없다”고 말했다. 다만 비행기를 통해 무역이 이뤄지는 반도체 업계는 구조상 수출실적 조정이 어려워 산업부의 요청이 없었다.
업계에 따르면 산업부 실무자들은 입·출항 기준을 조정하는 방법까지 제시했다. 하지만 이는 실무자의 행정 미숙에서 나온 제안으로 이런 방법으로는 수출실적을 앞당길 수도 없다. 보통 수출실적이 집계되는 시점은 업체들이 수출신고를 한 뒤 세관에서 신고가 수리된 시점(통관 기준)인데 수출국 도착 기준을 통관 기준으로 바꾼다고 해도 수출실적은 동일하기 때문이다.
산업부는 대표이사의 개인 연락처까지 요구했다고 한다. 업계의 한 관계자는 “긴급히 협의할 때 필요하다며 대뜸 대표이사의 개인 연락처까지 알려달라는 요구를 받았다”며 “점점 관리하려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고 전했다.
정부의 이 같은 압박에도 수출실적의 큰 흐름은 바꾸지 못했다. 지난해 전체 수출액은 사상 최초로 6,000억달러를 넘어섰지만 지난해 12월 수출액은 전년 동기 대비 1.2% 줄었다. 석유화학 수출액은 6.1% 감소했고 반도체(-8.3%), 자동차부품(-0.3%), 가전(-11.7%) 등 13개 주력품목 중 10개의 수출실적이 감소했다.
“이제는 성과를 내야 할 때”라는 정부에 대한 요구가 커지자 무리수를 던지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업계 관계자는 “어떻게든 방안을 찾아보느라 말일까지 관련 부서 업무가 사실상 마비 상태였다”며 “어떤 국가도 산업부 장관의 성과를 수출실적으로 평가하는 나라는 없을 것”이라고 꼬집었다.
업계에서는 ‘맥이 빠진다’ ‘과거 정부와 다를 바 없다’는 반응도 나온다. 산업 전반이 침체 국면에 접어들어 생존을 고민하는 상황에서 정부는 여전히 실적 홍보에 혈안이 돼 있다는 것이다. 최악의 부진에 시달리는 자동차 업계뿐 아니라 글로벌 경기 둔화에 유가 변수까지 겹치면서 화학 업계 역시 생존전략 마련에 분주하다. 포스코를 비롯한 굴지의 철강 업체도 세계 철강 생산량의 절반 가까이 차지하는 중국의 감산 정책이 시들해지면서 수익성 확보에 비상이 걸렸다. 수출실적이 대대적으로 보도되면 일부 업계에서는 통상 시비가 붙을 여지도 있다.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양’적 성장에 기대는 과거의 행태는 이제 지양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윤창현 서울시립대 경영학부 교수는 “우리 경제 전체의 활동을 나타내는 지표를 정부의 성과인 양 생각하고 숫자 늘리기 급급하기보다 근본적인 대안 마련에 공을 들여야 한다”고 지적했다.
/강광우·김우보기자 pressk@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