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성리 갈대밭’을 찾은 여행객들이 경치를 감상하며 산책로를 걷고 있다.
지금은 어딜 가나 거장 대접을 받는 박찬욱 감독이지만 20년 전만 해도 그는 보따리장수처럼 시나리오를 싸 들고 돌아다니는 처지였다. 아무리 영화사를 기웃거려도 이미 두 작품을 시원하게 말아먹은 그에게 선뜻 “같이 해보자”고 손 내미는 곳은 없었다. 세기말의 혼돈과 다가오는 새천년의 흥분이 교차하던 그날도 박찬욱은 영화사에 출근 도장을 찍었다. 여러 군데서 퇴짜를 맞은 박찬욱이 절박한 심정으로 택한 곳은 당대 최고의 영화사로 이름 난 명필름. 그는 회사 대표를 앉히고 각본들을 보여줬지만 역시나 반응은 시원찮았다. 그런데 하늘이 도운 것일까. 박찬욱의 시나리오에서 이야기꾼의 재능을 본 명필름 대표는 “판문점과 비무장지대를 배경으로 한 소설 ‘DMZ’를 영화화하려고 하는데 각색과 연출을 맡지 않겠느냐”는 역제안을 했다. 평소 남북 문제에 관심이 많았던 박찬욱은 앞뒤 재지 않고 냉큼 제안을 수락했다. 이 프로젝트는 ‘공동경비구역 JSA(이하 JSA)’라는 제목으로 지난 2000년 9월 개봉해 각종 흥행기록을 갈아치웠고 박찬욱의 인생을 바꿨다. ‘JSA’가 없었다면 ‘올드보이’도 없었을 것이라고, 박찬욱은 지금도 믿는다.
‘신성리 갈대밭’을 찾은 여행객들이 함께 찍은 사진을 확인하고 있다.
‘신성리 갈대밭’에 놀러온 방문객들이 이곳이 영화 ‘공동경비구역 JSA’의 촬영지임을 알리는 간판을 바라보고 있다.
박찬욱의 출세작인 ‘JSA’ 촬영지 가운데 여행 명소로 거듭난 대표적인 곳은 충남 서천군에 자리한 ‘신성리 갈대밭’이다. 이곳에 가면 바람에 넘실대는 갈대숲이 만드는 황금빛 장관을 만날 수 있다. 입구에 들어서면 ‘JSA’의 포스터 이미지를 활용해 제작한 안내판이 보이고 몇 걸음 옮기면 여행객을 위한 산책로가 나온다. 약 20만㎡ 대지에 일부만 산책로로 조성하고 나머지는 생태보존구역으로 관리하고 있지만 푸른 하늘과 갈대, 시리도록 맑은 금강이 어우러진 풍경은 잊기 힘든 감흥을 선물한다. 데이트 코스로도 좋고 혼자 생각을 차분히 정리하기 위해 떠나는 여행지로도 제격이다. ‘JSA’에서 신성리 갈대밭은 영화 시작 후 30분 정도 지난 무렵에 등장한다. 비무장지대 수색 도중 소변을 보기 위해 잠시 대열을 이탈한 이수혁 상병(이병헌)은 실수로 지뢰를 밟고 만다. 동료들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사이 이수혁 앞에 북한군 오경필 중사(송강호)와 정우진 전사(신하균)가 나타난다. 화들짝 놀라 총부리를 겨눠보지만 한 발짝도 뗄 수 없는 이수혁은 맥없이 총을 뺏긴다. 다 포기했다는 듯 이수혁이 “살려달라”고 울먹이자 오경필과 정우진은 “다 큰 게 울기는…”이라고 비웃으며 지뢰를 제거해준다. 이렇게 두 사람과 안면을 튼 이수혁은 병장으로 진급한 뒤 부하인 남성식 일병(김태우)까지 끌어들여 새벽이면 북한군 초소로 몰래 넘어가 과자도 나눠 먹고 술 한잔도 걸치며 체제를 뛰어넘은 우정을 나눈다.
드넓게 펼쳐진 ‘신성리 갈대밭’ 뒤편으로 푸른 금강이 흐르고 있다.
영화의 또 다른 주요 공간인 판문점이 나오는 장면은 남양주 종합촬영소에 세트를 만들어 찍었다. 남양주 종합촬영소는 세밀한 고증으로 실제와 똑같이 구현한 판문각과 팔각정·회담장 세트를 그대로 보존하고 있다. 다만 이곳은 지난해 6월부터 20명 이상의 단체관광객이 사전 신청을 한 경우에만 방문을 허용하고 있다. 세트 곳곳을 거닐다 보면 ‘그림자놀이’를 하며 천연덕스럽게 장난치던 이병헌의 연기가 또렷하게 떠오른다. 군사분계선 너머의 이병헌에게 침을 뱉으며 아이처럼 웃던 신하균의 환한 미소도 생생히 기억난다. 이처럼 배꼽 잡는 유머를 담은 장면들이 여럿 생각나지만 사실 ‘JSA’는 처음부터 비극의 숙명을 안고 태어난 작품이다. 마치 힘을 줘도 잘 오므려지지 않는 악력기처럼, 순진한 우정만으로 버티기에는 서로 다른 체제가 벌려놓은 틈이 너무 넓었기 때문이다. 이수혁의 제대를 앞두고 판문점의 ‘돌아오지 않는 다리’를 건너 다시 모인 네 사람은 끝내 되돌릴 수 없는 비극과 마주한다.
경기도의 ‘남양주 종합촬영소’에 마련된 팔각정에서 내려다본 판문점 세트.
이 장대한 드라마에 마침표를 찍는 것은 영화 초반 판문점을 둘러보던 한 외국인 관광객이 찍은 흑백사진이다. 얼굴을 트기 전의 네 사람은 저녁 어스름처럼 소리 없이 밀려오는 불행의 그림자를 감지하지 못한 채 보초를 서고 있다. 카메라는 헤엄치듯 부드럽게 움직이며 사진 속의 네 사람을 한 명씩 비추는데, 다시는 이들이 함께할 수 없음을 아는 관객의 심장은 슬픔으로 요동친다. 영화의 깊은 여운이 한창 극장가를 휘감던 무렵 박찬욱은 한 TV 다큐멘터리에 출연해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남북이 다시 하나로 뭉쳐서 사람들이 코미디 영화를 볼 때처럼 웃으며 ‘JSA’를 감상할 수 있는 날이 왔으면 좋겠어요. 저런 말도 안 되는 시절이 있었구나, 혀를 끌끌 차면서요.” 그로부터 18년이 흘렀는데 아직도 그날은 오지 않았다. /글·사진(서천·남양주)=나윤석기자 nagija@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