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법행정권 남용 의혹을 받는 양승태 전 대법원장의 검찰 출석을 하루 앞둔 10일 오후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검에서 사진기자협회 소속 기자가 포토라인을 설치하고 있다. /연합뉴스
검찰은 양승태(71) 전 대법원장이 재임하면서 법원행정처가 정치적으로 민감한 재판에 불법으로 개입하고 특정 성향의 판사를 사찰해 인사상 불이익을 주는 데 양 전 대법원장의 지시나 승인이 있었다고 추정하고 있다. 양 전 원장이 받는 범죄 혐의는 검찰이 지난해 11월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을 재판에 넘기면서 개략적으로 드러났다.
검찰은 임 전 차장의 공소장에서 양 전 대법원장이 44개 범죄사실과 관련해 임 전 차장 등과 범행을 공모한 혐의(직권남용권리행사방해 등)가 있다고 파악했다. 검찰은 양 전 원장이 임 전 차장 등에게서 직접 관련 내용을 보고받거나 지시한 정황을 확보한 것으로 알려졌다. 게다가 임 전 차장 기소 후 검찰의 보강 수사가 이어진 점을 고려하면 양 전 대법원장이 받는 범죄 혐의는 이보다 늘었을 전망이다.
양 전 대법원장이 받는 핵심 혐의 중 하나는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들이 일본 기업을 상대로 낸 민사소송에 개입했다는 것이다. 검찰은 이 혐의를 임 전 차장 공소장의 첫 번째 범죄사실로 적시하기도 했다. 대법원이 2012년 강제징용 피해자들에 대한 일본 전범기업의 배상 책임을 인정하는 취지로 판결해 놓고서 이듬해 박근혜 정부 청와대가 이 판결에 문제를 제기하자 법원행정처가 재판에 개입했다는 것이다.
검찰은 전범기업을 대리한 김앤장 관계자를 수차례 독대하거나 “배상 판결이 확정되면 국제법적으로 문제가 될 소지가 있다”는 의견을 재판부에 제시하는 등 양 전 대법원장 본인이 재판에 직접 개입한 정황을 확보한 바 있다.
전직 대법원장으로서는 사상 처음 검찰에서 피의자 신분 조사를 앞둔 양승태 전 대법원장의 대국민 입장 발표 장소를 두고 논란이 일고 있다. 9일 양 전 대법원장은 11일 오전 검찰 출석 전 대법원에서 사법농단과 관련한 자신의 입장을 밝힌 뒤 검찰청사로 이동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와 관련해 대법원과 구체적으로 조율이 되지 않은 상태이지만 양 전 대법원장은 대법원측이 내부 기자회견을 허용하지 않으면 정문 밖에서라도 입장발표를 하겠다는 입장이다. 사진은 2018년 3월 촬영한 서초구 대법원의 모습, /연합뉴스
양 전 원장은 전국교직원노동조합 법외노조 통보처분 관련 행정소송, 원세훈 전 국가정보원장의 댓글공작 사건, 옛 통합진보당 국회·지방의회 의원들의 지위확인 소송 등에서도 임 전 차장 등과 공모해 관여한 의혹을 받고 있다. ‘정운호 게이트’ 사건 당시 판사들을 상대로 검찰이 수사를 확대하는 것을 차단하기 위해 수사 정보를 유출하고 영장 재판에 가이드라인을 하달하거나 2015년 문모 당시 부산고법 판사의 비위 사실을 검찰로부터 통보받고도 징계절차를 밟지 않은 데 최종 책임자로 관여했다는 의혹도 추가됐다.
2014년부터 지난해까지 사법행정이나 특정 재판에 비판적인 의견을 낸 판사들에게 인사 불이익을 줄 목적으로 생산된 ‘물의 야기 법관 인사조치’ 문건을 보고받고 승인한 혐의도 있다. 검찰은 양 전 대법원장의 자필서명이 기재된 문서를 확보했다. 이밖에도 헌법재판소 내부정보 유출, 법관 사찰, 비자금 조성 등 세 차례 법원 자체조사와 검찰 수사로 불거진 각종 의혹에 연루된 상태다.
검찰은 양 전 원장을 상대로 임 전 처장이나 두 전직 대법관으로부터 재판거래 등과 관련한 보고를 받거나 이들에게 직접 지시를 내렸는지 등을 조사할 전망이다. 검찰은 양 전 대법원장 재임 시절 법원행정처장을 지낸 박병대(62)·고영한(64) 전 대법관을 최근 비공개로 다시 불러 조사한 바 있다.
작년 6월 이후 7개월 가까이 양승태 사법부의 사법행정권 남용 의혹을 수사해온 검찰은 수사과정에서 최종 책임자로서 양 전 원장의 혐의를 입증할 다양한 진술과 증거를 확보한 것으로 알려졌다. 다만 법원은 검찰이 지난달 청구한 박·고 전 대법관의 구속영장을 “임 전 차장과의 공모 관계 성립에 의문이 있다”는 이유로 모두 기각한 바 있어 혐의 입증에는 어려움이 따를 것으로 보인다. 법원행정처장을 지낸 두 전직 대법관의 공모 관계부터 입증이 부족하다는 판단을 법원이 내놓은 상황에서 양 전 대법원장의 공모 관계가 인정될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양 전 원장도 검찰이 수사를 본격화하기 전인 작년 6월 1일 자택 인근 기자회견에서 “대법원 재판이나 하급재판에 부당하게 간섭·관여한 바가 결단코 없다. 정책에 반대한 사람이나 재판에 성향을 나타낸 당해 법관에게 편향된 조치를 하거나 불이익을 준 적이 전혀 없다”며 의혹을 강하게 부인했다.
/이다원 인턴기자 dwlee618@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