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 테르텐 대표/이호재 기자
“카이스트 대학원 입학을 앞두고 있을 때 당시 교수님이 ‘암호’를 전공해보지 않겠냐고 제안하시더라고요. 당시에는 국내에서 암호를 공부하는 사람이 30명도 채 되지 않을 만큼 ‘암호’라는 말 자체가 생소했는데, 이후 석사와 박사 과정을 밟으면서 암호학에 더욱 매력을 느꼈고, 현실적이고 실용적인 일을 하고 싶어 창업에 나섰습니다.”
14일 서울 구로동 본사에서 만난 이영(49·사진) 테르텐 대표는 “당시에 낯설었던 암호학을 공부하겠다고 면접에서 말하니 학교에서 당황하길래 독학이라도 하겠다고 대답했던 기억이 난다”며 “다행히도 암호학의 베이스 중 하나인 정수론을 공부하셨던 교수님이 같이 하자고 제안해 보안 1세대로서 첫발을 내디딜 수 있었다”고 말했다.
지난 2000년 설립된 테르텐은 웹 브라우저 화면과 모바일 화면 등 멀티 플랫폼 화면 보안에서부터 모바일 앱과 모바일·PC 동영상 DRM 등의 멀티미디어 보안서비스 등을 제공하는 데이터 보안 전문기업이다. 웹 브라우저 화면에 표현되는 기밀정보와 개인정보의 유출을 방지하는 웹 브라우저 화면 보안 솔루션 ‘웹큐브(WebCube)’와 모바일 앱으로 유출될 수 있는 데이터를 보안하는 ‘T-MCM’, 기업 협력사 간 핵심정보를 독립적인 영역에서 보안하는 PC용 협력사 정보 유출 방지 솔루션 ‘T-DataWall’ 등을 제공하고 있다.
학교를 떠난 이 대표는 보안전문업체 창업에 나섰지만 현실은 만만치 않았다. 테르텐이 내놓은 서비스는 천리안 등의 PC통신을 쓰던 대중이 수용하기에는 기술력이 지나치게 높았기 때문. 이 대표는 “전용망과 워크스테이션을 쓰던 카이스트에서 공부하면서 실리콘밸리에서 나오는 최신 정보와 논문, 신문을 계속 보다 보니 과하게 앞서나갔던 것 같다”며 “인사이트가 아무리 좋아도 현실 세계에서의 타이밍과 맞았어야 했는데 경험 부족으로 그 부분을 고려하지 못했던 것이 원인”이라고 회상했다. 대기업에서 CSO(최고보안책임자)를 도입하기 시작한 게 2010년 이후일 정도로 2000년대에는 보안에 대한 인식이 크지 않았던 만큼 테르텐의 서비스는 당시 흐름과 어울리지 않았다는 설명이다.
막막했던 이 대표는 디지털저작권관리(DRM) 시장을 개척하며 사업 확대에 나섰다. 2003년 당시 유행하던 연예인 모바일 화보 서비스가 촉매제가 됐다. 한 연예인의 화보가 서비스 오픈 전에 해킹되고 불과 5분 만에 전국의 웹하드로 퍼지면서 큰 손해를 입었기 때문이다. 디지털콘텐츠가 제대로 보호받지 못하던 당시 환경도 호재로 작용했다. 추가 피해를 미리 피하고자 했던 업체가 테르텐을 찾았고 이후 이어진 화보 서비스는 해킹이나 불법 복제 등의 문제 없이 무사히 마무리됐다.
이 대표는 “해커한테 뚫리지도 않고, 엄청난 양의 트래픽 속에서도 스트리밍과 다운이 끊기지 않아야만 한다는 부담감이 컸다”면서도 “국내 최초의 디지털 콘텐츠 성공사례를 만들어냈다는 것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고 웃어 보였다. 이를 계기로 국내 디지털 콘텐츠 시장이 성장하기 시작했고, 테르텐은 싸이월드 등 유명 사이트의 관련 서비스를 담당하면서 전체 DRM의 약 80~90%를 수주했다. 특히 이 과정에서 포맷에 상관없이 적용할 수 있는 보안서비스를 제공해 시장 활성화를 이끄는 데 앞장섰다.
현재 테르텐의 보안서비스는 행정안전부의 민원24를 포함해 여러 공공기관과 SK텔레콤 등 대기업, 카드사와 생명보험사, 손해보험사 등 금융사, 보건복지부 산하 병원 등 다양한 곳에 적용되고 있다. 이들 기관이 갖고 있는 민감한 개인정보는 유출 시 큰 문제를 낳을 수 있는데 테르텐의 서비스를 이용할 경우 화면 캡처에서부터 원격 해킹, 클립보드 저장 등을 막아 유출될 수 있는 모든 경로를 차단할 수 있다. 이러한 기술은 탁월한 차별성을 인정받아 지난 2000년부터 일본 전자상거래 1위 업체인 라쿠텐의 내부 업무시스템 보안에 적용되는 등 일본 콘텐츠서비스 업체에도 수출되고 있다. 이 대표는 더 나은 보안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해 사이버보안의 선두주자로 꼽히는 이스라엘을 5~6년 전부터 오가며 현지 업체와의 협력을 추진하는 등 보폭을 넓히고 있다. 이 대표는 “테르텐의 경험과 이스라엘의 선진화된 기술이 만나 남들이 보지 못하는 시장을 볼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고 강조했다.
이 대표는 4차 산업혁명의 흐름 속에서 테르텐이 제2의 도약을 일굴 수 있을 것으로 확신했다. 가상현실(VR) 등 다양한 형태로 콘텐츠가 쏟아지는 가운데 멀티미디어 포맷에 최적화된 서비스를 제공해온 만큼 시대의 흐름에 최적화됐다는 설명이다. 이 대표는 “테르텐이 지난 18년간 해온 것이 훈련받지 않은 일반인이 다양한 포맷에서 서비스를 이용하도록 하는 것”이라며 “아무도 하지 않을 때 멀티미디어 포맷 시장을 준비해온 만큼 로봇에서부터 드론 등 움직이는 어떤 디바이스에도 대응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이어 “아무도 보안에 관심이 없을 때 기술만으로 세상에 증명한 것이 1라운드였고 테르텐이라는 브랜드로 제품을 출시한 것이 2라운드였다면, 3라운드에는 어떤 디바이스나 포맷에 대해서도 대응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될 것”이라며 “올해부터는 사이버보안회사로서 새로운 모습을 보여주며 조금 더 탄탄한 기술회사를 만드는 여정에 나설 것”이라고 덧붙였다.
/김연하기자 yeona@sedaily.com 사진=이호재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