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종로구 서린동에 위치한 SK그룹 본사인 SK서린빌딩의 사옥 네 귀퉁이 기둥 하부에는 물결모양의 마감재를 적용해 수중의 왕인 거북이의 발 모양을 형상화한 흔적이 있다. SK서린빌딩이 불의 기운이 강한 터에 자리 잡고 있어 풍수지리에 관심이 많은 고(故) 최종현 회장이 설계 당시 불의 기운을 막기 위해 건축가에게 요청했다고 한다. /사진=서울경제DB
서울 종로구 서린동에 위치한 SK그룹 본사 ‘SK서린빌딩’/사진=서울경제DB
1997년 외환위기(IMF)가 배경인 영화 ‘국가 부도의 날’을 보면 요즘 직장인들에게는 다소 의아한 장면이 나온다. 영화 속 한국은행 통화정책팀장을 맡아 고군분투하는 김혜수가 당시 재계 순위 14위까지 올랐던 한보그룹 본사를 찾아가며 들어선 곳은 허름한 아파트 상가 건물이었기 때문이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에도 대기업들의 사옥은 대부분 광화문이나 테헤란로·여의도 등 서울 3대 오피스 권역에 위치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영화가 과장됐다는 말도 나올 법하다. 하지만 실제 당시 한보그룹 본사 주소는 서울 강남구 대치동 316번지 은마아파트 상가 건물이었다. 빠르게 외형을 확대했던 한보그룹이 은마아파트를 본사로 사용했던 것은 정태수 회장이 풍수지리 신봉자였기 때문이다. 은마아파트는 세무공무원에서 한국 최고의 디벨로퍼로 변신한 후 재계 14위 그룹을 만든 정 회장 성공신화의 상징이기도 했다. 정 회장은 “사업을 하면 잘된다”는 점술가의 말에 사업을 시서울 스퀘어의 모습./송은석기자
작해 “쇳가루를 만져야 한다”는 점술가의 조언에 종합제철소 건설에 뛰어들었다가 부도가 나며 공중 분해됐다. 점과 풍수로 흥했다 점과 풍수로 망한 셈이다.
정 회장이 유별나게 풍수에 민감했지만 대부분의 재벌들도 풍수지리를 무척 중요하게 여긴다. 재계 1위인 삼성그룹을 비롯해 SK(034730)그룹, 신흥재벌 아모레퍼시픽(090430), 미래에셋금융그룹 등도 풍수에 따라 투자를 결정하고 건물을 사들이기도 한다.
재벌가 오너들에게 돈이 따라붙는 명당으로 명성이 높은 대표적인 지역은 서울 장충동이다. 풍수지리 학자들은 장충동을 ‘장군이 지휘하는 장군대좌형의 명당’으로 묘사한다. 주변 산세가 진을 치고 있는 주둔지와 같은 지형이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장충동 일대는 삼성과 신세계·한솔 등 범삼성가(家)의 명당 쟁탈전이 치열하게 벌어지기도 했다. 장충동1가 110번지는 고(故) 이병철 삼성그룹 창업주의 자택이 자리하고 있다. 또 110번지 뒤편 장충동1가 107-1번지 제원빌라에는 범삼성가의 장자인 이재현 CJ그룹 회장이 살고 있다. 4층 연립주택인 제원빌라는 현재 이재현 회장과 이 회장의 모친인 손복남 CJ제일제당 고문이 건물 전체를 소유하고 있다. 이병철 창업주의 장녀인 이인희 한솔그룹 고문도 장충동 106-1번지 장충레지던스에 터를 잡고 있다. 범삼성가에서 장충동 일대 땅을 차지하기 위해 경쟁을 벌이는 바람에 부동산 가격이 뛰기도 했다. 삼성은 오너들의 자택뿐 아니라 사무실과 사업지 선정 때도 풍수지리를 중요하게 고려한다. 과거 삼성생명에서 삼성그룹의 부동산을 관리했던 상업용 부동산 컨설팅 업계의 한 관계자는 “창업주인 고 이병철 회장과 이건희 회장은 새로 건물을 사거나 사업지를 찾을 때 보고서 마지막 장에는 꼭 풍수지리와 관련된 내용을 요약해서 넣었다”고 말했다.
서울 용산에 위치한 LS용산타워.
재벌들의 풍수에 대한 관심은 명당을 찾는 것뿐만 아니라 건물 설계에도 반영된다. SK그룹은 본사인 SK서린빌딩 설계부터 풍수지리를 반영했다. 불의 기운이 강한 터라는 지적에 고 최종현 회장은 이 사옥 네 귀퉁이 기둥 하부에 물결모양의 마감재를 적용해 수중의 왕인 거북이의 발 모양을 형상화했다. 또 청계천 방향으로 향하고 있는 주 출입구 계단에는 거북이 머리 모양을 만들었다. SK서린빌딩을 설계한 김종성 건축가는 “최종현 회장께서 풍수지리에 관심이 커 이에 위배되는 일이 없는지 검토해달라고 부탁했다”며 “풍수지리라는 것이 현대 건축의 원리와 비슷하고 과학적인 면이 있기 때문에 실제 설계 시에 이를 반영했다”고 설명했다. LS그룹도 LS용산타워(옛 국제센터빌딩)를 인수한 후 지난 2012년 한강대로 방향의 정문 외에 건물 후면에 새로 출입문을 만들고 양옆에 거북 석상 두 개를 설치했다. 좋은 기운이 더 많이 들어오게 하기 위함이다.
미신이라고 치부되기도 하지만 풍수지리는 돈을 버는 투자 판단에도 활용된다. 박현주 미래에셋대우(006800) 홍콩 회장은 국내 부동산 투자 시에 풍수지리를 중요하게 고려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미래에셋자산운용에서 부동산 투자를 담당했던 전 임원은 “박 회장은 고향인 광주 쪽의 유명한 풍수지리 전문가를 전담으로 두고 자문을 받았다”며 “사무실을 옮기거나 가구 배치뿐만 아니라 부동산 투자 시에도 풍수지리에 영향을 받았다”고 전했다. 실제 미래에셋운용은 현재 미래에셋그룹이 본사로 사용하는 을지로 센터원을 투자할 당시와 현재 재개발이 진행 중인 테헤란로 옛 르네상스호텔 투자를 검토할 당시에도 풍수지리를 고려했다고 한다.
항간에서는 기업의 흥망성쇠를 풍수지리와 연결 지어 해석하기도 한다. 대표적인 지역이 서울역과 용산 일대다. 이곳은 땅의 기운이 흉흉하기로 소문난 곳이다. 서울역과 용산 일대에 터를 잡았다가 무너진 기업이 한두 곳이 아니다. 서울역 맞은편 서울스퀘어(옛 대우센터빌딩)를 본사로 사용했던 대우그룹을 비롯해 벽산건설·해태그룹·한진중공업그룹 등이 서울역과 용산 일대에 자리를 잡았다가 사세가 기울어졌다. 풍수지리에 밝다는 강덕수 전 STX그룹 회장도 이 같은 비운을 피해가지 못했다. 재계의 한 관계자는 “강 전 회장은 풍수지리를 잘 보는 스님을 항상 대동하면서 사무실 책상 위치까지도 조언을 받았다”고 설명했다. 또 용산에 터를 잡고 있는 아모레퍼시픽의 경우 흉지로 소문난 땅의 기운을 피하기 위해 신사옥의 정문을 대로변인 한강대로가 아닌 반대편에 낸 것으로 알려져 있다.
/고병기기자 staytomorrow@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