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드 자카리아 워싱턴포스트 칼럼니스트·CNN ‘GPS’ 호스트
2019 세계경제포럼(WEF·다보스포럼)의 분위기는 과거 수년간의 그 어느 때보다 훨씬 진지하게 세계의 모습을 드러내 보여주지만, 거기서 나온 그림은 그다지 아름답지 않다.
포럼의 분위기는 침울하고 조심스러우며 불안하다.
글로벌 경기침체에 대한 얘기가 자주 나오지는 않지만 성장 스토리를 자신하는 사람들 역시 눈에 띄지 않는다.
세계에 심각한 정치적 위기가 발생한 것도 아닌데 사람들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민주주의의 현 상태, 개방사회와 국제질서에 관해 얘기한다.
백악관은 미국 공식 대표단의 2019 다보스포럼 참석 계획을 폐기했다. 의회와 대통령 간의 입씨름이 빚은 결과다.
그리고 이 같은 조치는 미국이 세계 무대에서 발을 빼고 있다는, 보다 폭 넓은 관점에 완벽한 메타포를 제공한다.
한편 유럽은 주의가 산만하고 분열돼 있으며 실의에 빠져 있다.
유럽의 3대 지도자들 가운데 오직 독일의 레임덕 총리인 앙겔라 메르켈만이 다보스에 모습을 드러냈다. 테리사 메이 영국 총리는 브렉시트(영국의 유럽연합 탈퇴, Brexit)를 둘러싼 혼란으로 이번 포럼에 참석할 수 없다.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은 국내 좌파와 우파가 합작한 포퓰리스트 시위를 이유로 다보스포럼 불참을 선택했다.
이런 환경 탓인지 평소 자유민주주의와 룰에 기반한 국제질서의 수호자를 자처하던 지도자들의 불참이 어느 때보다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그렇다고 새로운 글로벌 지도자들이 이들이 남긴 공백을 채운 것도 아니다.
일부 추측과 반대로 중국은 과거에 비해 이번 포럼에서 조용한 행보를 보이고 있다.
중국은 “존경받는 원로정치인인 왕치산 국가부주석을 다보스포럼에 파견했다. 그가 들고 온 메시지에는 중국이 ‘상생’ 해법과 글로벌 협력을 추구한다는 온건한 내용이 담겼다. 세계를 안심시키기 위한 메시지다.
이는 중국 역시 경제성장 둔화로 국내적으로 도전에 직면한 상태이고 시진핑은 중국이라는 거대한 사회를 장악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다는 현실을 반영한다.
다가오는 총선에서 예상보다 어려운 싸움을 치러야 하는 나렌드라 모디 인도 총리 역시 포럼에 불참한다.
그렇다고 올해 다보스포럼이 독재자들이 두각을 나타내는 자리가 되지도 않았다. 우선 포럼에 참석하는 독재자 수가 소수에 불과했다. 아마도 아직은 독재자들에게 호의적이지 않은 글로벌 규범을 반영하는 것으로 보인다.
서구 민주주의가 힘을 잃어가고 있지만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터키 대통령의 국정 장악력도 예전에 비해 상당히 약화된 상태다.
무함마드 빈 살만 사우디아라비아 왕세자와 함께 푸틴과 에르도안 역시 포럼에 오지 않는다.
새로 선출된 자이르 보우소나르 브라질 대통령은 포럼에 참석해 기대를 모았던 연설을 했지만, 이는 고작 6분 만에 끝났고 평가도 크게 엇갈렸다.
그나마 참석자들이 지속적인 낙관론을 보인 분야는 테크놀로지였다.
노바티스와 카길 같은 다국적기업 중역들은 앞으로 인공지능(AI)이 효율성과 생산성을 제고하는 데 현저히 기여할 것이라며 미래의 위대한 기술적 기회에 관해 이야기했다.
그들은 이를 멈출 수 없는 추세로 본다. 여기에 적응하지 않으면 경쟁 심화를 지켜봐야 한다.
중역들과 전문가들은 한결같이 일상적인 분석 기술을 요구하는 직종을 비롯해 또 다른 화이트칼라 일자리가 위험에 처할 수 있다고 경고한다. 그러나 다보스포럼에 참가한 최고경영자(CEO)들은 모든 일이 순조롭게 풀릴 것이라는 낙관론을 피력했다.
사업가들과 회사 중역들은 무역에 관해서는 드러내놓을 정도로 비관적이다.
그들은 미국과 중국 간 무역전쟁이 세계 전체로 번져갈 것으로 우려한다.
진짜 그런 일이 벌어지든 아니든, 세계화의 거대한 확장은 이미 끝장난 것이 분명해 보인다.
지난 15년간 무역에 관한 중대한 진전은 이뤄지지 않았고 사소하지만 숱한 차질이 발생했다. 아직은 대규모 보호주의와 관세전쟁으로 이어지지 않았으나 새로운 침체인 것은 분명하다.
서구가 분열된 것처럼 다른 지역의 사정도 비슷하다.
지난주 말 레바논의 베이루트에서 열린 아랍연맹 회의에 아랍 지도자들은 거의 참석하지 않았고 이로 인해 정상회의의 위상은 더욱 약화됐다.
중남미는 우익에 속한 보우소나르와 새로 선출된 멕시코의 좌파 대통령 안드레스 마누엘 로페스 오브라도르 등과 같은 지도자들 사이에서 두 갈래로 갈라진 상태다.
포럼에서 만난 여러 군소국가 지도자들은 전 세계가 집단적인 목적을 상실한 채 표류하고 있으며 여기저기서 편협한 자기 이익과 충돌의 파열음만 들려올 뿐이라고 말했다(이들은 하나같이 익명을 요구했다).
그들 중 한 명은 “미국이 개입해야 우리가 방향감각을 갖게 된다”며 “물론 일부 이슈에 대해 의견 불일치가 없지 않지만 적어도 큰 틀에서의 대화와 협력을 위한 노력이 전개된다”고 지적했다. 그는 이어 “미국이 뒤로 빠진 지금 경기후퇴, 무역전쟁에 대한 우려 등 부정적인 에너지만 분출되고 있다”면서 “이런 세계에서 우리는 쉽게 전진할 수 없다. 우리 모두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바로 이것이 국제무대의 중심에서 미국이 발을 뺀 포스트 아메리카의 세계다. 이는 중국의 지배 혹은 아시아의 오만으로 점철된 세계가 아니다.
노골적 반미감정이 기승을 부리는 세계는 아니지만 많은 사람이 보다 강력한 미국의 존재감을 갈망하는 세계다.
국가들이 각각 제멋대로 행동하고 자국의 편협한 이익을 추구하면서도 국제질서의 틀이 합리적 수준의 안정을 유지하기를 원하는 어그러진 세계다.
그러나 국제질서를 적극적으로 떠받치려는 나라가 전무한 상황이기에 심각한 질문은 여전히 남는다. 지도자들이 없는 세계에서 이 같은 시스템은 시간이 지나면서 약화되고 결국 붕괴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