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외 지역 최초로 일본군 위안부 피해를 상징하는 ‘평화의 소녀상’이 들어선 곳은 미국 캘리포니아주 로스앤젤레스 북쪽에 위치한 글렌데일이라는 작은 도시다. 지난 2013년 열린 행사에는 최근 별세한 위안부 피해자 김복동 할머니도 참석했다. 수많은 도시 중 한국과 특별한 인연도 없는 글렌데일에 ‘평화의 소녀상’이 설치된 이유는 무엇일까. 임지현 서강대 사학과 교수는 신간 ‘기억 전쟁’을 통해 ‘글렌데일의 민족 구성’에 답이 있다고 말한다.
글렌데일에는 해외에서 가장 큰 아르메니아인 공동체가 있으며 주민 중 40%가 아르메니아계로 알려졌다. 아르메니아인은 19세기 후반과 20세기 초반에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집단학살을 당한 ‘기억’이 있다. 저자는 “아르메니아 제노사이드에 대한 기억이 글렌데일의 아르메니아인들로 하여금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의 고통에 예민하게 반응하도록 만들었을 것”이라며 “강력한 아르메니아 공동체가 지지하지 않았다면 글렌데일에 소녀상을 세우기는 힘들었을 것”이라고 분석한다.
글렌데일의 ‘평화의 소녀상’은 특정 민족의 기억을 넘어 ‘보편 기억’이 만들어낸 산물로, ‘기억연구자’를 자임하는 저자가 중시하는 가치가 이 같은 기억의 연대다. 저자는 “역사가 공식적 대화라면 기억은 친밀한 대화”라며 “역사학 방법론이 문서 기록을 근거로 산 자가 죽은 자를 심문하고 재단하는 데 치우쳐 있다면, 기억 연구는 산 자가 죽은 자의 목소리에 응답해서 그들의 원통함을 달래는 데 힘을 쏟는다”고 말한다. 문서와 기록 중심의 공식기억보다 개개인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 사적이고 친밀한 영역에 있는 풀뿌리 기억, 즉 증언에 귀 기울여야 한다는 것이다. 증언은 불완전하고 때로는 부정확해서 홀로코스트 부정론자들과 일본군 위안부를 부정하는 일본 우익들에게 무시되거나 가치가 훼손되기도 하지만 희생자들의 증언은 문서와 기록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진정성’을 품고 있다.
마지막으로 저자는 전후 세대를 향해 이렇게 조언한다. “곤혹스러운 과거 앞에 당당한 사람보다 부끄러워할 줄 아는 사람이 많은 사회의 기억 문화가 더 건강하다. 과거사를 끄집어내 성찰하고 또 그 성찰의 기억을 지키고 끊임없이 재고해야 할 책임이 있다.” 1만8,000원
/김현진기자 stari@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