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들수록 손해"…계륵된 휘발유

공급과잉에 '벙커씨유'보다 저렴
고도화설비 늘린 정유업체 시름

선박원료로 주로 쓰이는 벙커씨유(고유황중유)가 자동차 원료로 쓰이는 휘발유 가격을 사상 처음으로 넘어섰다. 휘발유는 최근 20여년 동안 벙커씨유 대비 배럴 당 10~30달러 가량 가격이 높았지만 지속적인 공급 과잉으로 최근 넉달 사이에 가격이 역전됐다. 벙커씨유 등의 중질유를 원료로 휘발유, 경유, 등유 등 고부가가치 제품을 만들어내는 고도화 시설에 수 조원을 투자했던 국내 정유사들의 시름이 깊어지는 모습이다.


7일 한국석유공사 페트로넷에 따르면 92옥탄가 기준 국제 휘발유 가격은 이달 배럴당 61.67달러를 기록해 황함량 3.5%의 벙커씨유 가격인 62.05달러 보다 가격이 낮다. 지난해 2월의 경우 휘발유가 74.15달러이고 벙커씨유가 56.97달러였다는 점에서 가격 차이가 눈에 띈다. 휘발유와 벙커씨유 가격 차이는 지난해 10월까지만 하더라도 배럴당 10달러 정도였지만 지난해 11월 휘발유가 66.93달러, 벙커씨유가 68.25달러를 기록하며 관련 통계가 집계된 후 처음으로 역전됐다. 이후 넉달간 두 제품간 가격은 2달러 내외에서 엎치락뒤치락 하고 있다. 지난 2008년 12월 글로벌 금융 위기 당시 가격 차이가 3달러까지 좁혀지긴 했지만 이듬해 다시 10달러까지 벌어졌다는 점에서 ‘비정상적인 상황’이 계속되고 있는 셈이다.


이 같은 휘발유 가격 급락의 배경은 공급 과잉 탓이다. 미국은 휘발유와 나프타의 원료가 되는 경질유 위주인 셰일오일을 포함해 하루 평균 1,100만 배럴의 원유를 생산중이며 중국 등지에서는 정유 공장 가동률이 높아졌다. 시장조사기관인 글로벌데이터에 따르면 내년에는 글로벌 정유사의 생산설비가 5.1% 증가해 연 평균 석유수요 증가량인 1%를 크게 상회할 전망이다. 게다가 글로벌 한파에 따라 난방용 벙커씨유 수요가 높아지고 세계 최대 석유 생산지인 러시아의 고도화율 상승 등이 가격 역전 현상으로 이어졌다는 것이 업계의 해석이다. 손지우 SK증권 연구원은 “겨울철에 휘발유 수요가 감소한다고는 하지만 정유제품 수요의 비탄력성을 감안하면 결국 공급 과잉이 휘발유 가격 폭락의 가장 큰 원인”이라고 밝혔다.

지난 10여년간 수조원을 투자해 고도화율을 30% 수준으로 끌어올린 정유 업체 입장에서는 난감한 상황이다. 중질유분해시설과 같은 고도화 시설은 일반 정유시설 대비 투자비가 4~7배 가량 많이 들며 공정의 특성상 전체 산출 제품 중 15% 이상은 휘발유가 차지한다. 이때문에 일부 정유업체는 지난해 말부터 가동률을 낮추며 휘발유 가격 폭락에 대응 중인 것으로 전해졌다. 정유업계 관계자는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는 비싼 벙커씨유를 넣어 저렴한 휘발유를 만들어낼 수밖에 없기 때문에 일부 시설은 가동을 할 수록 손해를 본다”며 “몇 년전만 해도 벙커씨유는 휘발유는커녕 원유보다도 가격이 낮은 ‘계륵’같은 상품이었다는 점에서 정유업체들도 마땅한 대응이 없다”고 밝혔다.

업계에서는 선박 운송용 원료의 황 함량을 0.5% 이하로 낮추는 것을 골자로 한 ‘IMO2020’ 시행에 기대를 걸고 있다. 올 연말부터 기존 벙커씨유 수요가 경유 등으로 대체되며 고도화 시설을 갖춘 국내 정유사들의 마진이 올라갈 수 있으리란 기대 때문이다. 반면 휘발유 가격은 미국 셰일오일 공급이 계속되는 데다 전기자동차 보급이 활성화 될 경우 수요까지 줄어들 수밖에 없어 반등을 꾀하기 쉽지 않은 상황이다. /양철민기자 chopin@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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