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린에서 황정민은 이미 하나의 장르다. 신분을 속인 채 북한 고위직에 접근해야 하는 첩보원부터 악귀를 몰아내겠다며 굿판을 벌이는 무당까지 그가 보여준 연기 스펙트럼은 넓디넓은데 맡았던 배역 하나하나가 황정민 없이는 완성할 수 없는 캐릭터요, 빈틈을 찾아볼 수 없는 고밀도의 연기로 완성됐다. 그런 그가 카메라 문법의 힘을 빌릴 수 없는 네모 반듯한 연극 무대 위에 오르는 것은 배우 황정민의 이름 석 자를 내 건 도전이고 실험이다.
지난해 10년만에 연극 무대 복귀를 선언하며 ‘리처드 3세’로 무대연기의 정수를 보여줬던 황정민이 다시 ‘오이디푸스’로 관객을 마주했다. 권력에 대한 욕망으로 비틀어진 리처드 3세에 이어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근친상간을 저지를 저주받은 운명의 남자 오이디푸스로 분하면서 그는 ‘황정민’이라는 하나의 연극 장르를 완성해냈다.
‘황정민 연극’의 특징은 이렇다. 황정민은 빈틈없는 감정 연기로 객석의 몰입도를 높이고, 현대 관객에게는 다소 멀게만 느껴지는 고전마저도 지금 이 시대, 우리의 이야기로 만들어낸다. 한 배역을 2명 이상의 배우가 맡아 체력을 안배하고 무대의 다양성을 높이는 보통의 연극 무대와 달리 ‘원 캐스트’로 꾸려진 황정민 사단은 황정민 표 연극을 완성하는 힘이다. 황정민을 비롯해 신탁을 피해 갓 낳은 아이를 버리지만 결국 돌아온 아이와 혼인하고 마는 오이디푸스의 어머니 이오카스테로 열연한 배해선, 눈먼 예언자 테레시아스로 완벽 변신한 정은혜까지, 약 3개월에 걸친 연습과 공연기간 오로지 자신의 배역과 작품에 모든 에너지를 쏟아부은 배우들만이 보여줄 수 있는 연기의 정수가 무대 위에 펼쳐진다.
이 작품이 오늘의 관객들에게 남기는 깊은 울림은 비극 자체에 있지 않다. 감동이 배가되는 순간은 자신을 둘러싼 검은 운명의 진실을 알게 된 오이디푸스가 객석으로 걸음을 내디딜 때다. 아버지를 죽이고 테베의 왕이 된 오이디푸스는 전염병과 가뭄으로 고난을 겪게 된 테베의 운명을 바꾸기 위해 테베를 떠나기로 한다. 운명을 거스르려 할 때마다 더욱 운명의 노예가 되었던 오이디푸스는 자신의 삶을 둘러싼 굴레를 깨닫고도 멈추지 않는다. 저주 탓에 비가 내리지 않는 땅에 비를 내리기 위해 그는 화려한 왕의 옷을 벗어던지고 운명을 거스르는 걸음을 내딛는다. 황정민의 몸을 통해 분출되는 슬픔과 불안, 그 속에서 피어나는 의지가 객석에 전달되며 관객들은 까마득한 옛 신화 속 인물의 삶에, 그의 투지에 전율한다. 이것이 황정민 표 연극의 선물이다. 24일까지 예술의전당 CJ토월극장.
/서은영기자 supia927@sedaily.com 사진제공=샘컴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