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엽 미래에셋은퇴연구소 상무
사람들은 웬만해선 한번 정한 것을 바꾸려 하지 않는데, 이를 ‘현상유지편향’이라 한다. 이유는 제각각이다. 굳이 바꿔야 할 이유를 몰라서 그럴 수도 있고, 그냥 귀찮아서 일수도 있다. 변경했을 때와 하지 않았을 때를 비교해 어느 쪽이 나은지 판단하기 어려워 망설이거나 괜히 바꿨다가 잘못되면 책임이 돌아올까 두려워 내버려 두기도 한다.
퇴직연금 가입자들에게서도 현상유지편향을 볼 수 있다. 퇴직연금을 투자할 상품을 일단 고르고 나면 좀처럼 바꾸려 하지 않는다. 금융당국에 따르면 2017년 기준으로 전체 퇴직연금 가입자 중 90.1%가 운용지시를 한 번도 변경하지 않았다고 한다.
‘한번 신중하게 결정했으면 됐지, 변경할 필요가 있겠어’하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그게 그렇지 않다. 원리금보장상품을 예로 들어보자. 대다수 직장인들이 퇴직연금 적립금을 정기예금 등 원리금보장상품에 맡겨두고 있다. 2017년말 기준으로 전체 퇴직연금 적립금(167조원) 중 90%에 가까운 147조원이 원리금보장상품으로 운용되고 있다. 노후자금인 퇴직연금을 운용하는 데 있어 높은 수익보다는 안전을 우선시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면 퇴직연금을 원리금보장상품에 맡겨두면 문제가 없을까. 그렇지 않다. 원리금보장상품은 대부분 만기가 정해져 있다. 만기가 도래할 때마다 가입자는 새로이 운용지시를 해야 한다. 만기 때 운용지시를 하지 않으면, 기존과 동일한 상품에 재예치 된다.
어떤 근로자가 퇴직연금 적립금을 A은행의 1년 만기 정기예금에 맡겼다고 치자. 이 경우 만기 때 운용지시를 하지 않으면 A은행 1년 만기 정기예금에 다시 예치된다. 이때 금리는 재예치 당시 것을 적용한다. 이렇게 되면 최초가입 이후 금리가 떨어졌을 때 문제가 불거질 수밖에 없다. 근로자는 최초가입 당시 높은 금리로 퇴직연금이 운용되고 있겠거니 하고 생각하지만 실제 운용수익은 이보다 낮기 때문이다. 그나마 재예치 되는 경우는 다행일 수도 있다. 만기 때 이전과 같은 상품이 없으면, 머니마켓펀드(MMF)와 같은 대기성 상품에 운용되거나 현금성자산으로 남게 된다. 이래서야 원하는 수익을 얻기가 더욱 힘들어진다.
그렇다고 현상유지편향을 쉽게 바꿀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바꿀 수 없다면 거꾸로 이를 활용할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최근 정부는 퇴직연금 내 원리금보장상품 운용지시 방법을 개정하면서 기존 방식에 ‘특정금전신탁’ 방식을 추가했다. 시행시기는 금융기관마다 다소 차이가 날 수 있다. 특정금전신탁이란 가입자가 운용상품을 직접 고르지 않고, 금융회사에 운용지침을 주는 것이다. 이때 가입자가 지정할 것은 크게 4가지다. 먼저 투자상품 종류부터 정해야 한다. 원리금보장상품에는 예적금, 금리연동형보험, 이율보증형보험, 발행어음, 표지어음, ELB, RP 등 다양하다. 상품은 복수로 지정할 수 있다. 상품을 선택한 다음에는 만기를 정해야 하는데, 5년 이내 범위에서 연단위로 정하면 된다. 다음은 상품을 제공하는 금융기관의 신용도와 운용비율을 정하면 된다.
가입자의 운용지시가 끝났으면, 금융기관은 금융상품 만기가 도래할 때마다 가입자가 지정한 범위 내에서 가장 높은 금리의 금융상품을 찾아서 만기금액을 재예치 한다. 이렇게 되면 만기 때 이전과 같은 금융상품에 재예치 하는 것보다는 수익률을 개선할 수 있다. 퇴직연금 가입자의 현상유지편향을 활용해 수익률 개선 방안을 찾은 것이다.
특정금전신탁은 원리금보장상품을 투자할 때만 활용할 수 있다. 요즘 같은 금리가 낮을 때는 특정금전신탁을 활용한다고 해도 수익률을 크게 개선하기 어렵다. 수익률을 높이려면 펀드와 같은 실적배당상품에 투자해야 하는데, 가입 후 상품변경을 너무 자주 해도 문제지만 그대로 방치해도 좋은 성과를 얻기 힘들다. 입사부터 퇴직까지 장기간에 걸쳐 운용해야 하는 퇴직연금의 특성상 경제환경과 금리변화, 은퇴까지 남은 기간 등을 고려해 주식과 채권간 비중을 적절히 조정할 필요가 있다.
퇴직연금 가입자의 이 같은 수고를 덜어주기 위해 고안된 금융상품이 타깃데이트펀드(TDF, target date fund)다. TDF는 투자자가 별도로 운용지시를 하지 않더라도 은퇴까지 남은 기간에 따라 펀드가 알아서 자산비중을 조정해 주는 펀드다. 은퇴까지 남은 기간이 많은 청년기에는 주식 비중을 높게 가져가다가 은퇴가 다가올수록 채권 비중을 늘려 나가는 방식이다. 한번 결정하면 웬만해서 바꾸지 않는 현상유지편향을 고려한 금융상품이라 할 수 있다.
퇴직연금 가입자는 예상은퇴시점만 정하면 된다. TDF 이름엔 2020, 2025, 2030, 2035, 2040, 2045 같은 숫자가 붙어 있는데, 이는 예상은퇴시점을 나타낸다. 가입자가 2045년에 은퇴할 예정이면 펀드명에 2045가 있는 것을 선택하면 된다. 이후에는 가입자가 운용지시를 하지 않아도 은퇴까지 남은 기간을 고려해 펀드가 자동으로 위험자산 비중을 조정해 준다. 이 점에서 자산관리에 많은 시간과 노력을 쏟기 힘든 근로자에게 적합하다. /김동엽 미래에셋은퇴연구소 상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