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원전 279년 그리스 북부 에피루스(Epirus)라는 나라에 피루스(Pyrrhus) 왕이 있었다. 약탈과 침범을 일삼는 로마 때문에 골머리를 앓았다. 피루스 왕은 세 차례에 걸친 치열한 전투에 2만5,000명의 병사와 20마리의 코끼리 부대를 총동원해 결국 승리했다. 희생은 컸다. 군대의 4분의3을 잃었고 코끼리도 다 죽는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그는 ‘이런 전투를 한 번 더 이겼다가는 우리는 망한다’고 뒤늦은 장탄식을 했다. 후세 사람들은 ‘상처뿐인 승리’를 일컬어 ‘피루스의 승리’라고 말한다. 다음주 27일과 28일 양일간에 걸쳐 2차 북미정상회담이 베트남 하노이에서 열린다. 지난해 6월 싱가포르 1차 회담에서 구체적인 북한 비핵화 방안을 이끌어내지 못한 만큼 이번에는 비핵화 로드맵을 마련할 수 있을지 세계의 이목이 쏠린다. 하지만 돌아가는 비핵화 체스판을 보니 고개가 갸웃해진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문재인 대통령이 초창기에 보여줬던 비핵화 결기는 눈 녹듯 사라졌고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주장과 요구를 하나둘씩 받아주고 있다. 비핵화 로드맵과 시간표도 내놓지 않았고 핵시설에 대한 사찰·신고·검증도 약속하지 않았는데 선물부터 안겨주려고 한다. 자칫 잘못하다가는 핵(核)을 머리에 이고 요리조리 북한의 눈치를 살피며 살아야 할 판국이다.
골대가 옮겨지고 있다. 한미는 비핵화 협상 초기에 ‘완전하고 검증 가능하며 되돌릴 수 없는 한반도 비핵화(CVID)’를 전가의 보도처럼 부르짖다가 ‘최종적이고 완전히 검증된 비핵화(FFVD)’로 한 발 빼더니 지금은 ‘서두를 것이 없다’며 느긋하다. “비핵화 이전에 절대 제재완화는 없다”며 국제사회를 설득해 유엔 안보리 결의까지 받아놓고서는 이제 제재완화 카드까지 꺼내 들었다. 문 대통령은 지난 19일 트럼프 대통령과의 통화에서 “남북 철도·도로 연결부터 남북 경제협력 사업까지 그 역할을 떠맡을 각오가 돼 있다”며 트럼프의 귀를 잡아당겼다. 이에 트럼프 대통령은 20일(현지시간) 기자들에게 조건을 달기는 했지만 “북한 제재를 해제하고 싶다”고 말했다. 시간이 갈수록 모래성 무너지듯 ‘협상 바(bar)’가 낮아지고 있는 것이다.
경협비용을 한국이 떠안겠다고 했으니 ‘거래의 달인’ 트럼프 대통령으로서는 그야말로 손 안 대고 코 푸는 격이다. 국회 예산정책처 자료에 따르면 남북경협 10개 분야에 투입될 비용이 총 110조원을 넘는다. 이중 철도망 건설에 19조원이 필요하고 도로 현대화사업에 22조원이 소요된다. 우리나라의 올해 예산이 469조원이고 이중 일자리 예산이 22조원인 점을 고려하면 경협비용 규모에 입이 쩍 벌어진다. 부담은 뭉텅이 한숨을 토해내는 국민들이 고스란히 떠안아야 한다.
그러면 비용만큼 효과가 날까. 역사는 손사래를 친다. 1994년 제네바 합의 때 북한이 핵무기를 포기하는 대신 한국·미국·일본·유럽연합(EU)은 한반도에너지개발기구(KEDO)를 만들어 북한에 경수로를 지어주기로 했다. 총 사업비 46억달러 가운데 한국이 70%인 32억달러(당시 기준 3조5,000억원)를 부담했다. 곶감만 쏙 빼먹은 북한은 2005년 핵무기 보유를 공식 선언했고 그해 1차 핵실험을 감행했다. 한국은 닭 쫓던 개 신세가 됐다.
이번 하노이 선언이 알맹이 없이 쭉정이만 남지 않기를 바란다. 세상 사람들이 두 눈 부릅뜨고 실질적 성과를 기대하고 있는데 허울 좋은 이유로 과대 포장해서도 안 된다. 국제사회 제재는 북한 비핵화를 유도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린치핀이다. 비핵화 없이 제재완화에 나서는 것은 북한의 핵 보유를 인정하겠다는 것에 다름 아니다. 돌다리를 건너는 심정으로 ‘의심하고 검증하고 다시 의심하는’ 자세로 하노이 협상을 바라봐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현실주의 외교를 강조한 니콜로 마키아벨리는 지도자의 3가지 요건으로 비르투(Virtu·역량), 포르투나(Fortuna·행운), 네세시타(Necessita·시대정신)를 꼽았다. 제재를 풀고 유화(appeasement)정책을 펴기만 하면 북한이 완전한 비핵화로 나아갈 것이라는 포르투나에 기대서는 안 된다. 김 위원장이 비핵화를 언급했다고 해서 선의(善意)라고 철석같이 믿었다가는 낭패를 볼 수 있다. 아픈 역사에서 배우지 못하면 또다시 희생양이 된다. 하노이 선언이 피루스의 승리가 되지 않도록 경계해야 할 때이다./vicsjm@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