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51년 3월11일, 베네치아의 페니체 오페라 극장. 1,200여좌석이 꽉 찼다. 중간 휴식 20분을 포함해 3시간 동안의 오페라 ‘리골레토(Rigoletto)’ 초연은 대성공을 거뒀다. 따라 부르기 쉬운 ‘여자의 마음’은 곧 유럽 각국으로 퍼졌다. 이탈리아 통일운동에 앞장서는 ‘애국 작곡가’로 유명했던 주세페 베르디(Giuseppe Verdi)는 ‘리골레토’의 성공 이후에도 ‘라 트라비아타’ ‘아이다’ 등의 대작을 잇따라 내놓았다. 말년의 베르디는 ‘생애 최고작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리골레토를 ‘두 번째로 애착이 가는 작품’으로 꼽았다.
리골레토의 결말은 비극적이다. 젊고 잘 생긴 만토바 공작은 바람둥이로도 유명한데 조력자가 있다. 어릿광대 리골레토는 채홍사 노릇을 하면서도 외동딸 ‘질다’만큼은 꼭꼭 감췄다. 그러나 질다의 미모를 알아차린 공작은 대학생으로 변장해 접근하고 결국은 순결을 빼앗은 뒤 차 버린다. 분노한 리골레토는 암살자를 고용했으나 딸 질다가 아버지의 계획을 알고 공작을 대신해 죽는 줄거리다. 딸의 주검 앞에서 리골레토는 오열한다. ‘나는 저주한다. 너희를 증오한다.’
베르디는 리골레토의 줄거리를 프랑스의 문호 빅토르 위고가 쓴 희곡 ‘왕의 환락’에서 따왔다. 1832년 첫 공연 후 바로 금지당했듯이 베르디 역시 이탈리아를 지배하던 오스트리아 검열 당국에 걸렸다. 결국 배경과 등장인물을 변경하는 편법을 썼다. 프랑스 궁정을 이미 자손이 끊긴 만토바 공작가로, 제목은 ‘저주’에서 광대의 이름인 리골레토로 바꿨다. 베르디의 벤치마킹을 못마땅하게 여기던 빅토르 위고는 1858년 파리 공연을 보고는 감탄했다고 전해진다. 소련마저 1938년 ‘스타니스랍스키’ 극장을 열면서 리골레토를 개관작으로 올렸다. 한국 초연은 1958년.
베르디는 평생을 조국 이탈리아를 위해 애썼다. 오스트리아의 요한 스트라우스 부자나 베르디와 동갑인 리하르트 바그너 등 민족주의적 성향이 두드러진 당시 음악가 중에서도 베르디는 진도를 더 나갔다. 61세에 당선돼 5년 동안 상원의원을 지낸 뒤 남긴 말이 유명하다. ‘국회의사당을 오페라 극장인 줄 알고 간 내가 바보였지!’ 죽어서도 그는 사랑과 존경을 받았다. 89세 일기로 사망한 그의 장례식에는 20만 인파가 몰렸다. 사망 2년 전 그는 재산의 대부분을 ‘음악가의 집(Casa Verdi)’ 건립에 쏟아넣었다. 베르디가 생애 최고 작품으로 손꼽은 게 바로 카사 베르디다.
/권홍우 선임기자 hongw@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