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 백남준을 만나다]"위대한 '1,003대 TV탑' 상상…제 손에서 현실이 됐죠"

<2-上>백남준과 나의 이야기 (이정성 대표)

‘다다익선’ 설치 과정. /사진제공=이정성

백남준(오른쪽)과 이정성 아트마스타 대표는 1987년 ‘다다익선’을 계기로 만나 평생을 같이 작업했다. /사진제공=이정성


‘비디오 아트’로 세계 미술사의 지형을 바꾸고 한국 현대미술계에 결정적 영향을 끼친 백남준과 인연을 맺은 사람은 참으로 많다. 백남준은 동료로서 같은 시대의 작가들과 협력했고 선배로서 후배 미술가는 물론 기획자들을 이끌었고 행정가와 기업인들을 자극했다. 백남준이 뉴욕에 있는 동안 그의 작업실은 미술계 인사들의 성지 같았다. 백남준문화재단 이사장을 맡고 있는 김홍희 전 서울시립미술관장, 김선정 광주비엔날레 대표이사 등도 큐레이터로 자리잡기까지 백남준과의 인연이 결정적이었다고 회고한다.

특히 ‘백남준의 손’이라 불리는 이정성(75) 아트마스타 대표, ‘백남준의 전령사’ 정준모 전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실장, ‘백남준의 가계부’였던 박영덕 박영덕갤러리 대표는 지근거리에서 백남준을 오랫동안 지켜봤다. 이번에는 이 세 남자와 얽힌 백남준 에피소드를 풀어놓고자 한다.

이정성 아트마스타 대표가 1989년 미국 휘트니미술관에서 백남준의 ‘세기말’ 설치작업을 진행하다 잠시 쉬고 있다. 지난해 복원작업을 끝낸 이 작품이 마침 현재 뉴욕에서 전시중이다. /사진제공=이정성

이정성(75) 대표의 인생은 백남준 전후로 양분된다. 백남준을 만나기 전 그는 평범한 엔지니어, 전자회사 직원이었다. 조금 특이한 게 있었다면 전자회사의 직영대리점이 지금처럼 흔하지 않았던 시절이라 번화가에 설치한 쇼룸을 통해 기업을 홍보하던 ‘인연’이었다. 이를테면 현재의 강남구 삼성동 코엑스 자리에서 열린 1986년의 서울국제무역박람회(SITRA)였다. 번화가에 TV모니터를 쌓아놓고 눈길을 끌던 삼성전자 홍보실로부터 작업 의뢰를 받았다.

20인치 TV수상기 528대를 11줄로 쌓아 ‘TV 벽’을 만들어달라는 것이었다. 이정성은 모니터 외장을 살짝 바꿔 차곡차곡 쌓을 수 있는 반듯한 사각으로 개조했고 기일에 맞춰 업무를 끝냈다. 수백 대의 TV쌓기를 단시간에, 완벽하게 해 낸 것을 삼성 홍보실이 인상적인 사건으로 기억했다. 그 무렵 덕수궁에서 경기도 과천으로 본관을 이전한 국립현대미술관은 미술관 출입구 쪽 원형공간인 램프코어에 대규모 설치작품, 즉 백남준의 ‘다다익선(多多益善)’을 논의하기 시작한다.

그때까지만 해도 일본제 소니(SONY)로 작업하던 백남준은 ‘다다익선’을 계기로 삼성전자의 모니터 협찬을 받았고 그 후로도 줄곧 ‘삼성 TV’를 고집하게 된다. 문제는 ‘어떻게 만드느냐’였다. 백남준은 삼성전자 홍보실로부터 TV세트 1,450대(원래 작품에는 1,003대가 사용됐고 나머지는 교체용 여분)를 협찬받으며 “한국에 같이 일할 전자 기술자가 있을까” 물었다. 홍보실 담당자가 이정성을 기억해냈다.

“TV를 1,003대 쌓아 탑을 만들 건데 할 수 있겠냐”는 전화를 받은 이정성은 “그 절반인 500대를 했는데 배로 늘린다고 못할 게 뭐 있겠나. 다른 게 있다면 전에 했던 것은 벽이고, 이번엔 탑일 뿐”이라며 흔쾌히 ‘오케이’ 했다. 개막은 88서울올림픽을 기념하며 1988년 5월로 예정됐다. 백남준은 2년 가까이 작품을 구상하며 처음 모니터 90대 계획에서 개천절에 맞춘 1,003대까지 규모를 키웠는데, 정작 그는 작품을 ‘주문’만 해놓고 뉴욕 스튜디오로 떠났다. 실제 제작은 이정성의 몫으로 남았다.

“쌓는 건 문제가 아니다 싶었는데 진짜 문제는 비디오 분배기, 그러니까 하나의 입력신호를 여러 개의 영상장비로 동일하게 출력하는 분배기를 만드는 일이었어요. 그런 건 우리나라에 없었거든요. 입력단자 1개를 6개로 출력하는 일제(日製) 비디오분배기를 500달러에 구할 수 있을 뿐이었죠. 제가 TV 전자회로 기술자니까 만들어봤습니다. 삼성전자에서 부속을 지원받아 입력단자 1개를 22개로 출력시키는 분배기를, 86개나 만들었습니다. 개막까지 전까지 시간은 2개월 뿐이었는데 혼자 그 많은 것을 일일이 드라이버 돌려가며 만드느라 손바닥은 물집으로 부풀었어요.”

이정성은 백남준을 처음 만났지만 백남준 작품의 정체성을 정확하게 꿰뚫고 있었다. TV가 층층이 쌓인 외형뿐만 아니라 모니터에서 흘러나오는 비디오 영상의 내용물이 더욱 중요하다는 본질 말이다. 나중에 들은 말이지만 백남준은 ‘다다익선’을 맡기고 뉴욕으로 가면서 “나는 (1,003대 중) 반 만 작동해도 성공으로 본다”고 했다. 작가마저도 불가능하지 않을까 의심했던 그 일을 이정성이 해 냈다. 마침내 ‘다다익선’에 불이 들어왔고 한 번에 모든 모니터에서 영상이 들어오는 것을 본 백남준은 기대 이상으로 무척 흡족해 했다.

☞ 백남준의 손이 되다

엔지니어로 일하다 삼성 소개로 인연

다다익선 제작, 기대이상 결과물에

세기말Ⅱ·유럽 개인전 등 도맡아 작업




무사히 마쳤으니 그렇게 끝인 줄 알았다. 그러던 어느 날 백남준으로부터 또 전화가 왔다. 새로운 비디오설치작품을 만들고자 하니 제작을 좀 도와달라는 ‘주문’이었다. 미국 뉴욕의 휘트니미술관이 의뢰한 1989년작 ‘세기말(Fin de Siecle)Ⅱ’였다. 207대의 TV로 7채널 비디오를 보여주는 폭 12m, 높이 4.3m의 대규모 작품이다.

이정성은 군말 없이 미국으로 갔고 묵묵히 일했다. 역시나 백남준은 “잘 했다”며 기뻐했다. 마침 휘트니미술관은 지난해 9월28일 개막한 대규모 미디어아트 기획전을 통해 백남준의 ‘세기말Ⅱ’를 4월 14일까지 전시한다. 몇 년째 수장고에만 있던 작품이 이번 전시 계기로 수리·복원됐다. 지난해 복원 자문요청이 왔을 때도 이정성은 ‘군말 없이’ 도왔고 작품이 되살아나게 했다.

백남준이 이정성에게 주문한 세 번째 미션은 “스위스로 가서 일주일 동안 TV 80대로 작업하라”는 것이었다. 또 무작정 “간다”고 했다. 취리히 공항에 내리자 세관이 붙들었다. 비디오 분배기를 비롯한 전자제품이 한 짐이니 밀수로 의심을 산 것이다. 영어도 서툴었던 이정성은 그들의 독일말에 당황했으나 초강수를 뒀다. “문화 정책으로 온 건데 왜 이러냐”며 한국말로 싸웠다. 결국 1시간 실랑이 끝에 세관원이 풀었던 짐을 다시 싸 돌려보냈다.

공항 밖에서 그를 기다린 이는 백남준의 또 다른 독일인 조수였다. 그렇게 작업한 백남준의 작품이 1991년 취리히와 바젤 현대미술관에서 열린 개인전에 선보였다. 한국으로 돌아오자 백남준에게서 또 전화가 왔다. “잘 했다며?”

백남준의 비디오 기술 자문은 1963년 이후로 줄곧 일본인 엔지니어 슈야 아베 뿐이었지만 그때부터는 다음 작품을 구상할 때 이정성도 참여시켜 ‘무엇을 어떻게 만들 수 있는가’를 의논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이정성 삶의 후반기는 백남준과 함께 한 전무후무한 예술 여정으로 전개된다.

이정성 아트마스타 대표./성형주기자

☞ 백남준을 이어가다

白 ‘그 시대 최신부품으로 바꿔라’ 위임

회고전 참여 등 유작 관리로 여생 보내

내가 함께한 작품이 사랑 받으면 만족

이정성 대표는 현업 은퇴하고도 남았을 나이지만 지금도 매일 을지로 세운상가의 사무실로 출근한다. 업무의 상당 부분이 백남준의 유작을 보수하는 것과 관련돼 있다. 사무실에 불 꺼진 날은 백남준 유작 관리를 위해 해외출장 중일 때다. 어떤 이들은 ‘작가의 명성 뒤에 가려진 인생’이 아깝지 않았냐고 묻지만 이 대표는 “백남준 선생이 만든 작품이, 내가 도운 작품이 사람들에게서 엄청난 사랑을 받는 것, 그것이면 충분하다”고 답한다. 최근에는 뉴욕 휘트니미술관 뿐만 아니라 대전시립미술관 소장품 등 작동 못하던 백남준의 유작이 그의 손을 빌려 다시 불 밝히고 있다. 남은 고민은 하나, ‘다다익선’이다.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의 작품은 모니터 등 부품 노후화로 지난해 2월부터 1년 이상 불 꺼진 채 작동하지 못하고 있다.

이정성 대표는 생전 백남준이 써 준 위임장을 내밀었다. 백남준은 30여 년 전 그때 ‘다다익선’을 일임했듯 이후 작품 관리를 그에게 맡겼다.

“백남준의 작품에서 중요한 것은 모니터가 아니라 그 안에 담긴 비디오 영상입니다. 선생님이 열정 바친 부분은 비디오였으니까요. 생전에 함께 작업할 때도 백 선생님은 비디오만 잘 나오면 상관없다 하셨습니다. 하드웨어보다는 소프트웨어가 중요하다는 걸 아는 분이셨어요. 위임 내용을 적은 편지에도 지금의 부품이 (나중에) 없으면 그 시대 최신의 것으로 바꾸라는 이야기도 담겨있거든요.”

과학신봉자였던 백남준은 어쩌면 사후의 신기술과 자신의 작품이 만나기를 바랐을지도 모른다. 이 대표는 “100년 뒤 1,000년 뒤를 내다본, 잠시 현재에 들렀다 간 백남준이 오래 살고 끄떡없을 거라는 말에 세뇌돼 작가 사후를 철저히 준비하지 못했다”고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지금 내 나이가 백 선생님 돌아가신 나이보다 한 살 더 먹었고 이제는 나도 기억이 깜빡깜빡 한다”면서 “지금 내 머리가 백 선생님과의 일들을 잊지나 않을까 겁이 나고 앞으로 더는 기회도 시간도 없을 것 같아서 이렇게 이야기라도 풀어 기록해둬야 한다고 생각하고 그 시기로 바로 지금이 제일 적합하다고 생각한다”고 강조했다. ‘인간 백남준을 만나다’는 그렇게 시작됐다.
/조상인기자 ccsi@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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