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다르크 연대기’ 나경원, 그는 누구인가?

학창시절부터 사시패스까지 '공부의 신'으로 불렸던 그
정계 입문 후 외모와 유려한 언변으로 '스타 정치인'으로 급부상
서울시장, 원내대표 향한 두 번의 도전으로 최초의 시련 맞아
'오뚝이'처럼 다시 일어나 보수정당 최초의 여성 원내대표 되다


나경원 자유한국당 원내대표./오승현기자

2019년 초 여의도 정가에서 가장 주목을 받고 있는 인물은 제1야당인 자유한국당의 나경원 원내대표다. 지난 12일 국회 교섭단체 대표연설 자리에서 나온 ‘김정은 수석대변인’ 발언 이후 그에 대한 관심은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이 커졌다. 연일 문재인 정부와 여당에 대해 날 선 비판을 이어가고 있는 나 원내대표. 기존 ‘모범생’ 이미지에서 완전히 탈피한 그는 한국당 내부에서 프랑스의 여전사 잔다르크에 비유해 ‘나다르크’라는 별명을 얻었다.

■‘공부의신’이 판사를 거쳐 ‘스타 정치인’이 되기까지

원내대표 자리에 오르기 전까지 그에게 항상 꼬리표처럼 따라 붙었던 이미지는 ‘모범생’이었다. 화곡중·화곡고·화곡여상을 운영하는 홍신학원의 나채성 이사장의 딸로 1963년 태어난 그는 줄곧 주류의 삶을 살아왔다.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82학번 동기생인 조국 민정수석과 나경원 자유한국당 원내대표./서울경제DB

학창시절에는 전교 1~2등을 놓치지 않은 수재였다. 1982년 서울대 법대에 진학한 그는 ‘똥파리’ 학번으로 불리며 현재 다양한 분야에서 한국 사회의 주류로 성장한 82학번 동기들과 인맥을 쌓았다. 남편이자 동기생인 김재호 서울고등법원 부장판사도 학교에서 만났다. 1986년 졸업과 동시에 본격적인 고시의 길로 들어섰다. 1992년 사법고시 34기에 합격한 그는 부산지법, 인천지법, 서울행정법원 등에서 판사로 활약했다.

고시 공부를 하면서 결혼을 해 가정도 꾸렸다. 이 때문에 새로운 별명도 얻었다. 그는 임신 상태에서 사법연수원을 다니며 공부해 ‘나징가제트’라 불렸다. 마징가제트처럼 무쇠체력으로 끝까지 앉아서 공부했다고 붙여진 별명이다. 정작 나 원내대표는 당시를 추억하며 자서전에서 “여자로서 남편에게 근사한 프러포즈도 받지 못하고 서둘러 결혼한 것은 지금 생각해도 억울하다”고 말했다.

나경원 자유한국당 원내대표의 한나라당 서울시장 후보 시절 모습../서울경제DB

그의 평탄한 삶은 정계에 입문한 뒤에도 이어졌다. 판사 출신인 이영애 전 의원의 권유로 2002년 당시 이회창 한나라당 대선후보의 정책특보로 정계에 발을 들인 후 17대 비례대표로 국회에 입성했다. 이후 한나라당 대변인과 이명박 대선후보 캠프 대변인, 국회 문화체육관광방송통신위원회 간사 등을 거치며 두각을 드러내기 시작한 그는 18대 총선에서 서울 중구에서 재선에 성공하며 주류 정치인으로서 입지를 확고히 했다. 본인은 ‘무수리과’라고 말을 하지만 그를 ‘스타 정치인’으로 키운 것은 단정한 미모와 조리있는 화법이다.


그가 대중에게 각인된 또 하나의 계기가 있다. 이명박 대선 후보 대변인 시절 “주어가 없다”는 발언 때문에 유명세를 치른 이후 오히려 인지도는 상승했다. 당시 이명박 후보가 광운대 특강에서 “BBK를 설립했다”고 발언한 내용이 들어있는 동영상이 공개되자, “BBK라고 한 것은 맞는데 (내가라는) 주어가 없다”고 했다. 당내에선 “뛰어난 임기응변”이라는 평가를 받았지만 이후 ‘주어 경원’이라는 별칭을 얻으며 놀림 패러디 대상이 됐다.

2016년 5월 원내대표 및 정책위원회의장 선출 당선자 총회에 참석한 나경원 자유한국당 원내대표./서울경제DB

2016년 12월 새누리당 원내대표 선거에 참여했던 정우택 의원(왼쪽)과 나경원 현 자유한국당 원내대표./서울경제DB

■험난했던 서울시장과 원내대표 도전, 시련은 있었다

탄탄대로였던 나 원내대표의 정치 인생에도 그림자는 있었다. 서울시장을 향한 두 차례의 도전과 원내대표 재수 실패가 바로 그것이다. 2010년 서울시장 선거에 출사표를 던졌지만 당내 경선에서 고배를 마셨고, 2011년 오세훈 당시 서울시장의 사퇴로 치른 보궐선거에서도 박원순 현 시장에게 패배했다. 원내대표 자리를 향한 도전은 더욱 처절한 역사였다. 2016년 5월 원내대표 경선에서는 친박계 정진석 의원에게 26표 차이로, 같은 해 12월 선거에서도 친박계 정우택 의원에게 7표 차이로 눈물을 흘렸다.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오른쪽) 등이 26일 국회 본회의장에서 나경원 새누리당 의원(오른쪽에서 두번째)의 국회외통위원장 선출을 축하하고 있다//이호재기자.

■위기 극복하고 보수정당 사상 최초의 원내대표가 되기까지

수차례 위기를 맞은 그는 흔들릴지언정 쓰러지진 않았다. 2011년 서울시장 보궐선거 패배 직후인 19대 총선에서 불출마를 선언하며 흔들린 정치 생명을 2014년 재보궐 선거에서 살려냈다. 야권 단일후보인 고 노회찬 전 의원을 이기고 당당히 정치 행보의 신호탄을 스스로 올렸다. 지난해 한국당 원내대표 선거에서도 “삼수생 나경원이다”라는 발언을 남기며 표를 모아 마침내 보수정당 최초의 여성 원내대표의 선출됐다.

그동안 이지적인 판단력이 최대 강점으로 꼽혀온 그이기에 지금의 행보는 조금 놀랍게만 보이는 게 사실이다.

자유한국당 나경원 원내대표가 12일 오전 국회 본회의장에서 열린 교섭단체 대표연설을 마친 후 자유한국당 의원들의 축하를 받고있다. /이호재기자

하지만 최근 나 원내대표의 과감한 ‘나다르크’ 행보는 치솟고 있는 지지율로 인한 자신감이라는 평이 지배적이다. 18일 리얼미터 조사에선 민주당과의 지지율 격차를 5%포인트 안쪽까지 따라잡았다.

‘통합된 강한 야당’을 자신의 원내대표 기간 최대의 과제로 정했던 나 원내대표. 문재인 정부 집권 중반부로 접어들고 있는 시점에서 ‘나다르크’ 나경원이 어떤 모습을 보여주게 될지 그의 다음 행보가 기대된다. /이종호기자 phillies@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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