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년 전인 지난 2016년에도 국민연금의 의결권 향방은 관심이었다. 당시 재계는 국민연금이 조양호 대한항공(003490) 회장의 재선임,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의 사내이사 선임 안건에 대해 어떤 결정을 내릴지 촉각을 세웠다. 국민연금은 조 회장의 재선임에 대해서는 반대, 현 회장 선임 건에는 찬성 의견을 냈다. 국민연금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조 회장은 대한항공 회장으로 재선임하는 데 성공한다.
조 회장의 임기 만료를 앞두고 국민연금은 또다시 고민의 한가운데 섰다. 3년 전과는 상황이 사뭇 다르다. 글로벌행동주의 펀드가 조 회장의 연임을 반대하고 나섰다. 국내 대기업의 주요주주인 국민연금의 행보는 주총의 결과를 좌우할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 조 회장에 대한 법원의 혐의는 아직 확정되지 않은 만큼 국민연금이 ‘중립’ 의사를 표할 수 있다는 전망도 나온다.
25일 국민연금 기금운용위원회 산하 수탁자책임위원회는 27일 열리는 대한항공의 주주총회에서 의결하는 조 회장의 연임 안건에 대한 찬반 여부를 논의했지만 결국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산회(散會)했다.
이날 회의에 참가한 위원들은 ‘갑론을박’을 벌였다. 조 회장의 연임이 주주가치를 떨어뜨린다는 시민사회의 목소리와 그와 반대일 수 있다는 학계의 목소리가 정면 충돌한 것. 수탁자책임위의 한 관계자는 “조 회장의 연임을 막아야 주주가치를 낮출 수 있다는 의견과 연임안 부결이 되레 반대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는 의견이 팽팽히 맞섰다”며 산회의 배경을 밝혔다.
이날 회의가 관심을 끌었던 이유는 국민연금의 의결권 행사 방향이 27일 열리는 주총의 향배를 결정짓는 가장 중요한 요인이기 때문이다. 대한항공의 정관상 조 회장이 이사를 연임하기 위해서는 주총 참석주주의 3분의2 이상과 발행주식 총수의 3분의1 이상의 찬성표를 얻어야 한다. 대한항공의 1대 주주는 조 회장이 최대주주인 한진칼(180640)(29.96%)이다. 우리사주조합(2.14%)까지 포함하면 조 회장에 우호적인 지분은 32% 남짓. 여기에 대한항공 관련 단체 명의의 지분율(3.8%) 등을 감안하면 발행주식 총수의 3분의1 이상의 표는 확보했을 가능성이 높다.
문제는 주총 참석주주의 3분의2 이상의 표를 얻어야 한다는 점이다. 일단 지분이 어디로 튈지 모르는 소액주주가 56.34%에 달한다. 조 회장 연임을 반대하는 참여연대 등이 소액주주를 상대로 의결권 대리행사를 권유하고 있는 만큼 표를 확보하기가 쉽지 않은 상황. 2016년 조 회장의 연임에 반대표를 던졌던 국민연금도 11.56%의 지분율이 중요한 것은 이 때문이다. 주총 전 사전공개되는 국민연금의 의결권 행사 방향이 절반이 넘는 소액주주의 표심을 결정할 수밖에 없다. 쉽게 말해 국민연금이 연임 안건을 반대할 경우 조 회장이 경영권을 뺏길 수 있는 셈이다.
당초 이날 회의에서는 국민연금이 조 회장의 연임 안건에 대해 기권표를 행사하는 방향으로 의견이 모일 것이라는 분석이 우세했다. 특히 지난 21일 국민연금이 현대엘리베이터 주총에서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의 사내이사 선임 안건에 기권하기로 결정하면서 이 같은 분석이 힘을 얻었다. 현 회장은 지난해 1월 현대상선(011200)이 현 회장 등 전직 임원 5명을 배임 혐의로 서울중앙지방검찰청에 고소해 검찰 조사를 받고 있다. 배임·횡령 혐의가 있지만 아직 재판 중인 만큼 조 회장의 연임을 반대하기에는 명분이 부족하다는 해석이 나온 것도 이 때문이다.
더욱이 혐의가 확정되지 않은 상황에서 조 회장의 연임에 반대표를 던질 경우 국민연금이 팽팽한 사회 갈등에서 어느 한쪽의 손을 들어줬다는 비판이 나올 수 있다. 한진그룹은 대한항공을 제외한 한진칼, ㈜한진 등의 주총에서 행동주의펀드인 KCGI와 표 대결을 벌이고 있다. 이와 관련해 국민연금 기금운용위원회를 이끌고 있는 박능후 보건복지부 장관은 올 1월 어느 한쪽의 편을 들기 어렵다는 취지의 발언을 한 바 있다.
결론이 미뤄지면서 조 회장의 연임은 더욱 불투명해졌다. 실제로 국민연금의 의결권 자문사인 한국기업지배구조원(KCGS)은 조 회장의 이사 재선임 안건에 반대할 것을 권고한 것으로 알려졌다. 한국기업지배구조원 측은 “사익 편취를 위해 대한항공 등 계열사의 기업가치를 훼손했다는 기소내용을 고려하면 조양호 후보가 회사의 기업가치 제고와 주주의 이익을 최우선 목표로 사내이사로서 충실의무를 다할 수 있을지 의문”이라고 반대 권고 이유를 밝혔다.
/김상훈기자 ksh25th@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