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시정부는 지난 1919년 4월부터 1945년 11월까지 만 27년간 중국 상하이와 충칭 등지에서 활동하며 국내외 독립운동을 주도했다.
하지만 임시정부 역사에서 가장 어려운 때가 있었다. 임시정부는 1932년 4월29일 윤봉길 의사의 상하이 훙커우공원 특공작전 이후 비교적 안전하던 프랑스조계에서 쫓겨나 중국 관내 여러 곳을 떠돌아다녔다. 특히 한인애국단장으로 이 특공작전을 주도했던 김구와 임시정부 요인들은 1932년 5월부터 1937년 7월 난징을 떠날 때까지 5년여 동안 매우 어려운 고난의 시기를 보내야 했다.
이 시기 김구 등 임시정부 요인과 그 가족들이 상하이 서남부의 자싱과 하이옌·난징 등으로 옮겨 다닐 때 3년 동안 이들을 적극 보호하고 지원해준 인물이 있다. 바로 추푸청(1873~1948년)이다. 그는 아들 추펑장과 며느리 주자루, 관련 지인과 며느리 집안까지 총동원해 김구와 임시정부 요인들을 적극 비호하며 임시정부가 재기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해줬다.
추푸청은 1873년 중국 저장성 자싱현 남문 메이완제(梅灣街)에서 태어나 일본 도쿄 도요대 고등경정과를 졸업했다. 일본 유학 중인 1905년 중국혁명의 대부 쑨원과 함께 도쿄에서 중국동맹회를 창립해 혁명파와 연계해 활동했다. 특히 1905년 말 귀국한 뒤에 고향에서 중국동맹회 저장 지부장을 맡는 등 혁명운동을 계속했다. 특히 그는 국공내전 기간에도 애국민주운동에 적극 참가하는 등 저장성의 대표적 애국지사와 명사로 명성을 떨첬다.
추푸청은 절친한 사이였던 박찬익의 요청으로 김구와 임시정부 요인들을 보호하게 된다. 추푸청은 장남 추펑장을 설득해 이들 한국인들을 적극 보호·후원하라고 지시했다. 당시 그는 ‘상하이전절공회(上海全浙公會)’ 이사장을 맡고 있어 상하이·자싱·항저우 등 저장성 지방에서 영향력이 컸다.
임시정부의 중국 자싱 피난 시기 추펑장의 집에서 추푸청의 가족들과 함께하고 있는 김구(뒷줄 오른쪽 세번째)와 임시정부 요인들. 추푸청의 양아들 천퉁성(뒷줄 왼쪽)과 부인(앞줄 왼쪽)의 모습도 보인다. /사진제공=백범김구선생기념사업협회
임시정부 자싱 피난 시기 김구가 은신하고 있던 천퉁성의 집 뒤에 비상 대기하고 있었던 배.
◇임시정부 사심 없이 지원, 중흥 기틀 제공=김구와 임시정부 요인들이 피신한 곳은 세계대공황의 영향으로 폐쇄된 자싱의 면사공장인 ‘슈룬사창(秀綸沙廠)’ 일대의 추푸청과 그의 아들 추펑장 소유 목조건물이었다.
김구는 현재 자싱 메이완제 77호인 추푸청의 양아들인 천퉁성(陳棟生)의 집에 은거했다. 골목 입구에 큰 매화나무가 있어 메이완제로 불렸다. 이 집은 뒤쪽의 운하와 바로 연결돼 있어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뒤에 항상 조그만 배를 대기시켜 뒀다. 당시 이곳에 거주하던 임시정부 요인들은 김구 외에도 이동녕·김의한·박찬익·엄항섭·이시영·조성환·조완구·차리석 등과 그 가족들이었다. 김구 외 임시정부 요인들과 가족들은 메이완제 르후이차오(日暉橋) 17호 건물에 기거하며 피난생활을 했다.
김구는 이때 중국 남부의 광둥인 장진구(張震球) 혹은 장진(張震) 행세를 하며 일제의 추적을 피하기 위해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자싱 ‘민국일보(民國日報)’ 사장 왕쯔량(王梓良)은 당시 추푸청의 지원 사실과 임정 요인, 가족들의 모습을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추푸청 선배는 외부인들이 절대 모르게 하기 위해 자기 소유의 마황탕 공장을 한국 독립운동가들에게 피신처로 제공했다. 한동안 마황탕 공장 안에서 외국어로 이야기하는 소리가 들렸다. (중략) 왕뎬(王店)경찰소장 진푸위(金璞玉)가 이 일을 유심히 보고 직접 방문해 확인해보니 한국 독립운동가들이었다. 이에 그들에게 강에서 300보도 떨어지지 않은 곳에 상하이~항저우 간 철로가 있으니 잦은 외출을 삼가고 비밀리에 행동할 것을 부탁했다.”
“한국인들은 젊고 힘이 셌다. (중략) 매일 오후4~5시가 되면 반드시 당교(塘橋) 위에서 목욕을 했는데 물에서 뛰면서 즐거워했다. 지도자 김구 선생도 소식을 듣고 마황탕으로 이들을 찾아왔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김구가 자싱현 메이완제와 재청별서(載靑別墅·피서산장) 등에서 피신하고 있을 때 상하이 일본총영사관 경찰과 서울 조선총독부 헌병대에서는 김구를 체포하기 위해 혈안이 돼 중국 상하이 부근 한인 소재지를 탐문하고 다녔다. 조선총독부 보고서는 이러한 사실을 증명한다.
일본 당국은 김구에게 처음에는 20만원(元)에 달하는 거액의 현상금을 내걸고 그를 체포하기 위해 백방으로 준동하였다. 그러나 아무런 소득이 없자 2차로 일본 외무성과 조선총독부, 상하이 주둔 일본군사령부 세기관의 합작으로 60만 원이라는 엄청난 액수의 현상금을 내걸고 많은 밀정과 첩자들을 동원해 김구를 체포하고자 했다.
1930년대 초 중국 자싱·난징 등지 한 달 노동자 생활비가 30원 정도였으니 60만원이면 상상할 수도 없는 거액이라고 할 수 있다. 현재 물가로 환산하면 약 200억원에 달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김구와 임시정부 요인들은 자싱의 명사 추푸청과 그의 아들 추펑장, 양아들 천퉁성, 며느리 주자루와 그 일족, 친지들의 비호로 일제의 추적을 피해 무사히 생존할 수 있었다. 물론 일제의 침략에 맞서기 위한 한중 양 민족의 이해관계가 일치해서 이러한 지원이 가능했다고는 하지만 이들을 도왔던 중국국민당 당국과 중국인 친구들의 폭넓은 아량과 올곧은 헌신·열성은 높이 평가하지 않을 수 없다.
◇유명 지도자나 영웅 뒤의 숨은 조역들 주목해야=김구는 추펑장의 부인 주자루 여사의 친정집에서 하룻밤을 자고 앞으로 6개월이나 머물게 될 재청별서로 이동할 때 이들의 진심 어린 환대에 큰 감동을 받았다. 특히 무더운 여름철에 산후조리도 제대로 하지 못한 주 여사가 땀을 뻘뻘 흘리며 직접 가솔을 이끌고 피신지로 안내할 때의 고마운 심정을 김구는 후일 ‘백범일지’에 생생하게 기록했다. 그는 이때의 장면을 활동사진기로 찍어 자손이나 동포들에게 영원히 전하게 하고 싶다는 심정을 토로하기도 했다.
이들의 헌신적 도움으로 살아남은 김구는 1933년 여름부터 만 4년여 동안 난징 일대에서 처녀 뱃사공 주아이바오(朱愛寶)의 도움으로 일제의 추적을 피해가며 은신할 수 있었다. 또 중국 정부의 도움으로 중국 군관학교에 한인 청년들을 입교시켜 독립군 장교를 양성하며 임시정부 재건을 위해 분투할 수 있었다. 김구와 처녀 뱃사공 주아이바오와의 인연은 중국인 작가 샤녠성(夏輦生)에 의해 1999년 ‘선월(船月)’이라는 소설로 형상화하기도 했다.
추푸청은 자신은 물론 가족들의 위험을 무릅쓰고 김구와 임시정부 요인들을 고향인 자싱으로 피신시켰다. 그의 적극적인 도움으로 김구와 임시정부 요인, 가족들은 여러 차례 숙소를 옮기며 일경의 체포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김구는 자싱에서의 어려운 선중(船中) 생활에 대해 ‘오늘은 남문 호수에서 자고, 내일은 북문 강변에서 자고, 낮에는 땅 위에서 행보나 할 뿐이었다’고 회고했다.
일제의 압박과 거액의 금전적 유혹을 뿌리치고 굳은 믿음으로 한국인 친구와 임시정부 요인들을 철저히 보호한 추푸청과 그 가족들! 추푸청은 정말 우리가 어려움에 빠져 있을 때 충심으로 성의를 다해 한국 독립운동가와 그 가족들을 보호함으로써 의리와 신의를 끝까지 지키는 믿음직한 중국인 친구로 남아 있는 것이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6년 추푸청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했다.
현재 중국을 이끌고 있는 시진핑 국가주석은 중국공산당 저장성 성위원회 서기 겸 인민대표위원회 주임을 맡고 있을 때인 2006년 7월 이 재청별서를 방문해 김구의 도피생활에 대해 관심을 표명한 바 있다. 또 그는 2014년 7월 서울대에서 한 연설에서 상하이 임시정부 청사와 윤봉길 의사 기념관, 시안의 광복군 유적지 등을 거론하며 한중 우의를 강조하기도 했다.
윤봉길 의사의 의거와 그로 인한 임시정부의 유랑과 이동, 그리고 이봉창·윤봉길 의사의 의거를 주도했던 김구의 피난으로 연계된 자싱·하이옌과 한국 독립운동의 인연은 지금까지도 아름다운 한중 우의의 상징으로 남아 있다. 특히 추푸청 후손과 김구 후손의 인연도 계속되고 있으며 현지 항저우한인회에서 추푸청 후손을 돕기로 했다는 소식도 있다.
1992년 한중 수교 이후 한중 관계는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비록 간혹 갈등 양상이 나타나기도 하지만 추푸청·추펑장과 김구·임시정부 요인들 사이에 있었던 87년 전의 아름다운 우정을 생각하면 좀 더 거시적으로, 그리고 좀 더 유연하며 폭넓은 사고와 상대방에 대한 배려를 가져야 하지 않을까. /장세윤 동북아역사재단 수석연구위원
장세윤 동북아역사재단 수석연구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