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항공(003490)의 2대 주주인 국민연금의 의결권 행사로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의 대한항공 경영권에도 빨간불이 들어오게 됐다. 조 회장의 퇴진을 요구하는 사회적 압박이 거센 만큼 지난 2016년 국민연금이 반대표를 던졌을 당시 경영권을 수성한 것과는 정반대의 결과가 나올 수 있는 상황이다. 소액주주의 손에 경영권을 놓게 되는 첫 총수가 될 수 있다는 전망도 나온다.
국민연금이 반대표를 던지기로 결정하는 데는 장장 이틀의 시간이 걸렸다. 25일 첫 회의를 열어 갑론을박을 벌였지만 결국 결론을 내지 못하고 산회했다. 26일 5시간에 가까운 논쟁 끝에 조 회장의 연임을 반대하기로 결정했다. 전체회의에는 주주권행사분과 위원 8명과 책임투자분과 위원 2명이 참석했으며 표결 결과는 반대표를 던진 위원이 6명, 기권을 주장한 위원이 4명이었다.
조 회장의 연임을 반대하기로 결정한 이유는 270억원 규모의 횡령·배임 혐의였다. 조 회장은 대한항공 납품업체들로부터 항공기 장비, 기내면세품을 사들이면서 총수 일가가 지배하는 페이퍼컴퍼니를 끼워 넣어 196억원 상당의 통행료를 챙긴 혐의로 기소됐으며 ‘꼼수’ 주식 매매, 사무장 약국 운영 등으로도 재판을 받고 있다. 더욱이 국민연금이 1월 대한항공을 ‘중점관리기업’으로 지정해 ‘경영 참여’에 해당하는 강도 높은 주주권 행사를 검토하기도 했다.
2016년 조 회장의 연임에 반대표를 던졌던 것도 국민연금의 선택지를 좁히는 원인이 됐다. 당시 국민연금은 과도한 겸임과 재직기간 과다로 독립성 훼손의 우려가 있다며 사내이사 선임 건에 반대표를 던진 바 있다. 여기에 사회적 공분을 불러온 한진그룹의 일탈과 이에 따른 배임·횡령이 겹치면서 결국 반대표를 던질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수탁자책임위 회의를 앞두고 국민연금의 의결권 자문기관인 한국기업지배구조원(KCGS)도 조 회장의 이사 재선임 안건에 반대했다.
이로써 조 회장은 27일 주주총회에서 ‘운명의 갈림길’에 놓이게 됐다. 대한항공 정관상 조 회장이 이사를 연임하기 위해서는 주총 참석주주의 3분의2 이상과 발행주식 총수의 3분의1 이상의 찬성표를 얻어야 한다. 대한항공의 1대 주주는 조 회장이 최대주주인 한진칼(29.96%)이다. 우리사주조합(2.14%)까지 포함하면 조 회장에게 우호적인 지분은 32% 남짓. 여기에 대한항공 관련 단체 명의의 지분율(3.8%) 등을 감안하면 발행주식 총수의 3분의1 이상의 표는 확보했을 가능성이 높다.
문제는 주총 참석주주의 3분의2 이상의 표를 얻어야 한다는 점이다. 일단 지분이 어디로 튈지 모르는 소액주주가 56.34%에 달한다. 우선 조 회장의 연임을 반대하는 참여연대 등이 소액주주를 상대로 의결권 대리행사를 권유하고 있는 만큼 표를 확보하기가 쉽지 않은 상황이다. 도덕적 가치를 우선하는 외국인 주주(24.77%)도 마찬가지다. 지분 11.56%를 가진 2대 주주인 국민연금이 주총을 앞두고 반대표를 던지겠다고 의결권 방향을 사전공개한 만큼 소액주주의 표심도 반대로 쏠릴 수 있는 상황이다.
대한항공 측은 국민연금의 결론을 두고 유감이라는 반응을 내놓았다. 대한항공 관계자는 “국민연금의 이번 결정은 장기적 주주가치를 고려하지 않은 것”이라며 “특히 사법부의 판결이 내려지지 않았음에도 무죄추정의 원칙이라는 법적 가치마저 무시하고 내려진 결정”이라고 반발했다. 또 대한항공이 ‘이해관계 직무 회피 규정’을 위반했다고 주장한 일부 위원이 표결에 참여하면서 논란의 씨앗을 남겼다.
수탁자책임위는 또 27일 주총을 여는 SK(034730)의 최태원 SK그룹 회장 사내이사 선임 건에 대해서도 “기업가치 훼손 내지 주주권익 침해 이력이 적용된다”며 반대하기로 결정했다. 염재호 전 고려대 총장의 사외이사 선임도 반대하기로 했다. 이해 상충에 따른 독립성 훼손 우려가 있다는 이유다. 김병호 전 하나금융지주 부회장을 사외이사 및 감사위원으로 선임하는 데 대해서는 찬성했다. 다만 국민연금의 반대에도 최 회장의 재선임 안건은 주총을 무난히 통과할 것으로 예상된다. 2016년 국민연금의 반대에도 최 회장은 연임에 성공한 바 있다. /김상훈기자 ksh25th@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