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일 저녁 6시50분, 서울 서초동 변호사교육회관을 향하는 변호사들의 발걸음이 분주했다. 서울변호사회가 소속 변호사들을 대상으로 마련한 태영호 전 영국 주재 북한공사의 북콘서트 때문이었다. 서울변회는 미리 참석신청을 받아 북콘서트를 매달 진행하고 있다. 평균 30~40명 수준의 신청에 그쳤던 지난 회차와 달리, 이날 태 전 공사의 북콘서트는 금세 200석이 매진(?)되는 기록을 달성했다. 서초동의 한 중형 로펌 소속 변호사는 “꼭 가고 싶었는데, 신청하려고 보니 이미 마감됐더라”며 허탈해했다.
저녁 7시10분쯤 변호사회관 강연장에 태 전 공사가 들어서자 변호사들은 열렬히 환호했다. “반갑습니다” 라며 활짝 웃어 보인 태 전 공사는 “하노이 회담이 결렬된 이유와 그 이후 북한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이야기하고자 한다”고 운을 뗐다. 태 전 공사는 지난해 북한 이야기를 담아 ‘3층 서기실의 암호’란 책을 출간했다.
태영호 전 영국 주재 북한공사./연합뉴스
◇“하노이 회담서 트럼프로부터 봉변 당한 김정은”
=태 전 공사는 하노이 회담이 결렬된 이유를 본격적으로 설명하면서 “김정은이 봉변당한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미국이 하노이 회담 직전까지 치밀하게 계획을 세웠다고 했다.
“트럼프가 트위터로 ‘김정은 믿는다’면서 러브콜 보내고 하노이까지 편하게 오라고했다. 그래서 김정은은 미국의 의도 모르고 하노이까지 왔다. 마치 발걸음이 개선장군 같았다. 큰 열차 편성해서 정치국 위원 태우고 하노이 회담장에 도착했으나 김정은은 뒤통수를 맞았다.”
태 전 공사에 따르면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은 스몰딜(small deal)로 영변 핵시설 하나 내놓고 핵심 경제 제재를 풀고 가려고 계산했다. 그런데 회담장에 들어가기 직전까지 아무 이야기 없었던 미국이 뜻밖에 핵 은폐 시설 이야기를 꺼냈다고 한다.
태 전 공사는 “플루토늄과 우라늄이 핵물질인데, 플루토늄은 위성에 걸려 미국이 들여다볼 수 있다. 하지만 우라늄 농축은 아파트처럼 아무 곳에서나 할 수 있다. 미국 정보기관이 파악한 결과 우라늄 농축 등 핵 은폐 시설이 더 있는 것 같으니 이 정도 정보까지 더 내놓으면 제재 풀겠다고 트럼프가 김정은에게 요구했다”고 말했다.
트럼프가 핵 은폐 시설 이야기했을 때 김정은이 대단히 놀라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은 것이라고 태 전 공사는 설명했다. 핵 은폐 시설이 없다고 말하면 트럼프가 자리에서 바로 일어날 것이고, 핵 은폐 시설이 있다고 말하면 정보를 노출해야 해서다. 그는 “결국 김정은은 준비하고 있지 않다가 봉변을 당했고 핵 은폐시설에 대해 침묵하고 하노이 떠나버린 것”이라고 덧붙였다.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연합뉴스
◇언론 이용한 주민 통제, 이미 불가능한 북한
=태 전 공사는 역사상 최고 영도자가 뒤통수를 맞은 것은 김정은 위원장이 처음이라고 말했다. 그는 “북한은 최고 존엄인 영도자를 신적인 존재로 만들고 운영되는 시스템”이라며 “그런데 뒤통수 맞고 당황한 김정은이 갈팡질팡하니까 회담 끝나고 몇 분 동안 북한 내에 회담 관련 보도도 안 나왔다”고 말했다. 태 전 공사는 “미국은 이번 회담에서 김 위원장이 위세를 떨어도 실제 회담장에서 한방 맞으면 흔들린다는 큰 약점을 알게 된 것”이라고 했다.
북한의 정치 구조상 하노이 회담이 결렬됐다고 해도 성공적인 회담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그는 설명했다. 태 전 공사에 따르면 노동신문 보면 김정은이 북한을 떠날 때 트럼프 만나러 간다고 선언했다. 평양시는 전기가 없어서 저녁에 암흑인데, 그날은 온 평양에 전기 공급하고 TV 보도 내보내면서 축하 분위기 만들었다고 한다. 회담이 결렬되자, TV와 노동신문은 ‘싸우고 헤어졌어도 이번 회담은 평화에 이바지한다’, ‘북미 관계를 새 관계로 도약시킬 수 있는 것’이라고 포장해 보도했다.
하지만 이제 북한은 언론을 이용한 주민 통제가 불가능한 상황이라고 태 전 공사는 강조했다. “지금까지 북한은 외부 정보를 국가가 통제했으니 회담이 결렬돼도 성과라고 보도하면 북한 주민이 믿는 구조였다. 그런데 지금은 해외에 나가있는 북한 주민이 10만명이다. 이 사람들이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스마트폰 사 들고 한국 소식을 본다. 같은 한글을 쓰는 덕분이다. 이걸 알고 있는 김정은은 평양에 돌아온 후 보도된 내용을 보고 “그걸 누가 믿냐? 되는 소리를 해야지”라고 지적해 북한이 성공적 회담이라는 내용의 보도를 멈췄다.”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만나 악수하고 있는 모습./사진제공=YTN
◇하노이 회담 결렬로, 해외 북한 노동자들 다 돌아가야 할 판
=태 전 공사의 말에 따르면 김 위원장은 딜레마 상태다. 하노이 회담 이후 경제 제재가 풀리면 북한도 잘 살게 된다고 공언했지만 결렬돼서다. 해외에 퍼져 있는 노동자 9만명이 북한으로 돌아가야할 판이다.
북한 주민들이 예전 같지 않다는 것을 김 위원장도 알고 있다고 한다. 태 전 공사는 “주민들을 먹고 살게 해야 체제가 굴러간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김 위원장 입장에서 대북제재 장기화는 딜레마”라고 했다.
지금 북한에서는 권력통제기관인 공안기관이 힘을 못 쓰고 있다고 그는 말한다. 한국상품이 장마당에서 버젓이 팔리고 이제는 이 흐름을 돌려세울 방도가 없다는 의미다. 그는 “한 두 사람 처형할 수는 있겠지만 중국 밀수통로 통해 한국 화장품, 중고 옷까지 다 들어가고 있다”며 “대북경제 제재 장기화에 대해 김 위원장은 물과 공기만 있으면 살 수 있다고 동요하지 말라고 말하는 정도(웃음)뿐이다”고 말했다.
◇“북한 외교관 90% 이상은 북한 체제 반인륜적이라고 생각”
=“북한 시스템을 회의적으로 바라보는 반감이 생긴 것은 오래 됐다. 북한 외교관의 90% 이상은 북한 시스템이 있을 수 없는 반인륜적인 시스템이라 생각한다.”
강연 말미에 태 전 공사는 늘 이야기했듯 북한 체제를 탈출한 것은 자녀들의 문제가 가장 컸다고 말했다. “아이들이 영국 학교에서 매일 왕따를 당했다. 영국애들이 ‘너희 나라는 어떻게 인터넷도 없느냐. 북한애들은 답답해서 어떻게 사느냐’고 놀린다. 아이들은 내게 영국서 공부해보니 유투브 등 인터넷이 이렇게 좋은데 왜 북한은 이런 걸 허용하지 않느냐고 물었다.”
태 전 공사의 마음을 가장 심하게 흔들었던 건 “아버지 참 대단하다”는 아이들의 자조 섞인 말이었다. 마음 속으로는 북한이 비합리적이란 걸 알면서 외부에서는 박수치는것이 가능하냐고 아이들이 물었다. 이어 본인들은 그렇게 못하겠다고 했다고 한다. 그는 “아이들이 변하는 것을 보면서 다시 북한으로 돌아가면 큰일 나겠다고 생각했다”며 “이미 세상 돌아가는 것을 다 아는 아이들이 얼마나 고통스럽고, 아버지인 나를 얼마나 원망할까 싶었다”고 말했다.
/백주연기자 nice89@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