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5일 프로배구 V리그 여자부 챔피언결정전 3차전 시청률은 역대 최고인 2.68%까지 나왔다. 앞서 프로야구 개막일인 23일에도 여자부 챔프전 2차전의 시청률은 프로야구 5경기 가운데 4경기보다 높았다. 포스트시즌 최종 무대와 정규리그 경기라는 차이가 있기는 했지만 국민 스포츠 프로야구를 여자배구가 시청률에서 앞섰다는 사실은 스포츠계에 신선한 충격으로 받아들여졌다. 여자배구 열풍의 중심에는 흥국생명 핑크스파이더스 배구단과 사령탑인 박미희(56) 감독이 있었다.
박 감독은 1980년대에는 최고 스타 플레이어로 2000년대에는 TV 해설위원으로 팬들의 큰 사랑을 받았다. 이제는 감독 생활 5년 만에 정규리그·챔프전 통합 우승이라는 또 하나의 성공신화를 이룩했다. 우승의 흥분이 채 가시지 않은 29일 박 감독을 서울 종로구 흥국생명빌딩에서 만났다.
박미희 여자프로배구 흥국생명 감독이 29일 서울 종로구 흥국생명빌딩에서 배구공을 들고 포즈를 취하고 있다. 박 감독은 “이렇게 공을 들 때면 선수 시절로 돌아가는 느낌”이라고 했다.
그는 “시즌 내내 5개월간 한 번도 안 걸리던 감기가 챔프전이 끝나니 찾아왔다”며 코를 훌쩍이더니 “챔프전 상대로 좋은 경기를 보여준 한국도로공사 선수들과 코칭스태프에게 감사하고 고생하셨다는 말씀을 꼭 드리고 싶다”고 했다. 최근 여자배구의 인기가 높다는 얘기를 꺼내자 “인기를 얻는 데는 정말 오랜 시간이 걸리지만 잃는 것은 한순간이다. 저부터 더 공부하고 노력해야 한다”고 했다.
한껏 자세를 낮췄지만 그는 한국 4대 프로스포츠(야구·축구·배구·농구) 사상 통합 우승을 이룬 최초의 여성 감독으로 역사에 남게 됐다. 그가 이끈 흥국생명은 27일 도로공사를 3승1패로 누르고 12년 만에 통합 우승을 달성했다. 국내 프로스포츠에 여성 감독은 박 감독에 앞서 두 명이 있었다. 하지만 한 시즌 만에 옷을 벗거나 시즌이 끝나기 전 중도 사퇴했다. 박 감독은 2014년부터 햇수로 6년째 한 팀을 맡으며 정규리그 우승 두 번에 챔프전 우승을 한 번 했다. 그는 “선수 시절에도 놓친 경기에 대한 아쉬움은 아주 오래가는 반면 이기고 나서의 기쁨은 잠깐이더라. 지금도 비슷해 생각보다 덤덤하다”며 웃었다.
말은 덤덤하다고 했지만 박 감독은 우승 확정 직후 말을 잇지 못할 정도로 많이, 오래 울었다. 2016-2017시즌 정규리그 우승을 하고도 챔프전에서 1승을 한 뒤 3패로 돌아섰고 2017-2018시즌에는 최하위인 6위로 마감하는 등 굴곡이 많았기 때문이다. 박 감독은 “올 시즌도 사실 시즌 내내 위기였다. 연패도 없으니 밖에서는 수월했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았다”고 털어놓았다. 감독이라는 자리의 역할에 대해 특히 고민이 깊었다고 한다.
“각자 다른 이유로 힘들어하는 선수들을 보면 어떤 상황인지 대부분은 뻔히 보이거든요. 그래도 반드시 스스로 해결해야 할 문제가 있고 그렇게 이겨내야 한 단계 성장한다는 생각에 그저 관심을 갖고 두고 보는 경우가 많았는데 그 과정이 참 쉽지 않았습니다.” 박 감독은 “주전보다 훈련을 더 많이 하면서도 기회에 대한 기약이 없는 게 백업 선수들인데 그들과의 관계를 잘 가져가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했다”고 돌아봤다. 시즌 중이나 경기 중에 고비가 올 때는 2년 전 뼈저린 실패의 경험을 선수들과 공유했다. 챔프전 패배 뒤 경기장을 빠져나갈 때 유독 서글프게 들렸던 퀸의 ‘위 아 더 챔피언스’를 함께 떠올렸다. 2년 전에는 장송곡처럼 들렸던 노래를 이제는 승리의 찬가로 즐길 수 있다.
非시즌에 ‘감독에 원하는 것’ 익명 메모
선수 대할땐 형광펜 덧칠하며 꼭 살펴
스스로 할 일 다독이며 팀워크 다져
요즘 박 감독이 가장 많이 듣고 접하는 단어는 ‘유리 천장’이다. 2014년 처음 지휘봉을 잡을 때도 그랬고 지금은 더 많이 듣는다. 박 감독은 “감독이라는 자리는 거의 남성들 차지였는데 여성이 오니 좀 이상했을 것이고 자리를 뺏는다는 느낌도 있었을 것이다. 처음에는 상대팀 감독에게서 ‘여자 감독한테 지면 안 된다’는 승리욕이 보이기도 했다”면서 “돌아보면 실제로는 그런 게 없는데 스스로 그렇게 의식을 많이 했던 것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여자라서, 여성 감독이라서 다르게 보거나 저 자신이 의식을 하는 일은 지금은 거의 없다”고 했다. 감독 생활 초반에 “다른 누구보다 후배들의 열렬한 지지가 큰 힘이 됐다”는 그는 “내가 잘해야 후배들에게도 길이 열린다는 생각에서 더 힘을 냈다”고 돌아봤다.
박 감독은 선수단 숙소의 분리수거와 방 환기를 꼼꼼히 챙기고 끼니는 안 거르는지, 밖에 나갈 때 너무 얇게 입지는 않는지 확인하는 등 ‘엄마 리더십’으로 유명하다. 특히 선수들에게 다가갈 때 꼭 거치는 절차가 하나 있다고 한다. 바로 책상 밑 가장 잘 보이는 곳에 형광펜으로 강조해놓은 메모를 읽는 것이다. 박 감독은 “비시즌이면 꼭 감독에게 원하는 것들을 익명으로 제출하게 하는데 한 번은 이런 내용이 있었다. ‘모든 것에 간섭하려 하지 말아주세요’ ‘모든 선수를 똑같이 대해주세요’. 그걸 보는 순간 머리가 띵했다”고 했다. 그는 “나름대로 선수들에게 잘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게 아니었구나 싶었다. 선수들을 대할 때 제 입장에서는 1대 다수지만 선수들 입장에서는 1대1이라는 것을 그때 깨달았다”면서 “선수들이 알아서 할 일과 감독이 얘기해줘야 할 일을 구분하기 위해 그 메모에 형광펜으로 덧칠하고 매일 아침 주의 깊게 본다”고 했다.
‘내가 잘해야 후배에 길’ 유리천장 극복
인재 발탁 자질 갖춘 경영마인드도 필요
한 번 더 조화 이뤄 2연패 달성할 것
박 감독은 좋은 감독의 조건으로 “경영 마인드를 어느 정도 갖춰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그는 “감독은 매일 배구 기술을 가르치는 자리만은 아닌 것 같다. 24시간 훈련한다고 꼭 성과가 나오는 것도 아니다”라고 운을 떼면서 “아무리 세계적인 지도자가 온다 해도 선수 구성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어렵다. 기업이 인재 발탁에 총력을 기울이는 것처럼 좋은 선수 구성을 위해 감독의 판단이 아주 중요하고 구단에 선수 영입을 요구하는 접근법 등도 중요하다고 본다”고 말했다. 박 감독이 제대로 쉴 틈도 없이 다음달 전국중고대회 참관을 위해 강원도 태백으로 달려가려는 것도 이런 배경에서다.
흥국생명에 12년 만의 통합 우승을 안겼으니 다음 목표는 당연히 2연패다. 박 감독은 “연속 우승하는 감독이 되는 것은 당연한 바람이지만 쉽지 않으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 저를 포함한 코칭스태프와 선수들의 노력, 구단 지원이 한 번 더 조화를 이뤄야 한다”면서 “우승에는 선수들의 공이 절대적으로 컸지만 상대팀 사정 등 저희를 둘러싼 여러 상황과 타이밍이 좋았기에 가능한 일이었다는 것도 잊지 말자고 강조한다”고 했다.
어떤 스포츠인으로 남고 싶으냐는 물음에 박 감독은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는 머릿속으로 어떤 장면을 상상하는 듯하더니 “언젠가 길에서 후배를 마주쳤을 때 ‘선배님’ 아니면 ‘언니’라는 격의 없이 반가운 인사를 받고 싶다. 그렇게 존경받고 친근한 선배가 되기 위해 지금보다 더 노력하겠다”고 했다.
/양준호기자 miguel@sedaily.com 사진=오승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