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동의 십리벚꽃길을 메운 분홍빛 벚나무.
또다시 벚꽃철이 됐다. 우리나라에 벚나무들이 군락을 형성해 흰 꽃잎이 날리는 곳은 여러 곳이 있다. 제주대 캠퍼스에서 꽃망울이 벌어지는 것을 신호탄으로 봄과 함께 화신(花信)은 북상한다. 이 중에서 회자되는 벚꽃 명소 중 한 곳이 경남 하동의 쌍계사 십리벚꽃길이다. 기자는 이곳을 서너 차례 찾았지만 번번이 진입에 성공하지 못하고 발길을 돌렸다. 서울에서 아침 일찍 출발해도 하동에 도착하면 시간은 정오를 넘어서고, 이때쯤이면 십리벚꽃길은 인파로 미어터져 도로는 주차장을 방불케 했다.
그래서 올해에는 십리벚꽃길에서 진행되는 벚꽃 축제보다 하루 이틀 앞서 하동군을 찾았다. 하동군청 관광과에 들러 개화 상황을 물었더니 담당 공무원은 “현재 벚꽃은 90%쯤 피었다”고 했다.
군청을 서둘러 나와 화개장터로 들어간 덕분에 벚꽃길 진입에는 성공했지만 몰려든 인파는 피해갈 수 없었다. 상춘객들은 넘쳐났고 화개장터는 밤늦도록 흥청거렸다. 곳곳에 들어선 천막에서는 술과 음식을 팔고 음악을 틀었지만, 홀로 취재에 나선 기자는 일찌감치 방에 들어가 잠을 청했다. 그리고 다음날 새벽 동이 트기 전 인적이 드문 틈을 타 쌍계사로 향했다.
화개장터에서 쌍계사로 들어가는 십리벚꽃길은 화개천을 가운데 두고 양쪽으로 나 있다. 쌍계사로 올라가면서 오른편인 동쪽 길은 벚나무가 조금 어린 편인 데 반해 왼쪽 길의 벚나무들은 굵고 꽃이 조밀했다. 이곳에 식재된 벚나무의 숫자는 1,200그루다. 1931년에 신작로가 생기면서 지역 유지들이 돈을 모아 조성한 가로수들이다. 이들 벚나무는 화개장터에서 쌍계사로 들어가는 6㎞ 구간을 분홍꽃으로 장식하고 있다.
사랑하는 청춘 남녀가 이 길을 손잡고 걸으면 부부로 맺어져 백년해로한다는 설이 있어 일명 ‘혼례길’이라고도 하는데, 시간이 시간인지라 연인은 찾아볼 수 없고 30~40년쯤 해로한 새벽잠 없는 중장년 부부들만 길을 오르고 있었다.
길이 끝나는 곳에 쌍계사가 있다. 신라 성덕왕 21년, 대비·삼법 두 승려가 당나라 육조 스님의 초상화를 가져와 ‘지리산 계곡에 봉안하라’는 계시를 받고 절을 지어 조사를 봉안하고 ‘옥천사’라고 이름을 붙였다. 이후 문성왕 2년 진감국사가 ‘쌍계사’로 개칭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쌍계사는 서부 경남의 사찰을 거느리는 조계종 25개 본사 중 제13교구 본사로 국보 한 점, 보물 여섯 점과 일주문·천왕상·정상탑 등의 문화유산과 칠불암·국사암·불일암 등의 부속암자를 거느리고 있다.
쌍계사 취재를 끝내고 내려오는 길은 서쪽 길을 택했다. 이 무렵 동이 터서 기자가 올라왔던 동쪽 길은 산그늘에 가렸지만 내려가고 있는 서쪽 길은 햇빛을 받아 벚꽃이 반짝였다. 차들은 갓길에 버려졌고 차에서 내린 사람들은 카메라와 휴대폰을 들고 나와 꽃을 찍고, 서로를 찍고, 자기 얼굴을 찍었다.
하동의 화개장터에서 쌍계사로 들어가는 6㎞ 구간을 장식하고 있는 벚나무.
이곳에서 지체하면 인파에 묻힐 것 같아 웬만큼 찍은 사진이 담긴 카메라를 둘러메고 벚꽃길을 빠져나와 청학동으로 향했다. 하동읍에서 청학동까지의 거리는 대략 50㎞로 차로 한 시간 거리다. 지리산 삼신봉(三神峰·1,284m)의 동쪽 기슭 해발고도 800m에 자리 잡고 있는 청학동 주민들 모두 상투를 틀고 도포를 입었을 것으로 생각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청학동 입구의 관광안내소에서 만난 이정경 해설사는 “청학동 주민은 700명인데 대부분 일반인”이라며 “이들 중 옛 생활방식을 고집하는 갱정유도(更定儒道) 교인은 7~8가구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이들이 사는 마을은 청학동 끝에 위치한 도인촌(道人村)으로 기독교 신자이던 이승만 대통령 시절 핍박을 피해 순창·남원 등지에 살던 이들이 하나둘 모여들어 정착하면서 마을을 이루게 됐다. 이 해설사는 “1990년대 들면서 도인촌 젊은이들이 외지로 떠나 주민 수가 급감했다”며 “현재 남은 주민들은 농사를 짓거나 서당·예절교육을 실시하는 대안학교 등을 운영하며 살고 있다”고 말했다. /글·사진(하동)=우현석객원기자
하동의 화개장터에서 쌍계사로 들어가는 6㎞ 구간을 장식하고 있는 벚나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