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대통령이 5일 강원도 고성군 토성면 천진초등학교를 방문해 산불로 터전을 잃고 대피해 있는 주민들을 위로 하고 있다. /고성=연합뉴스
삽시간에 삶의 터전을 불사르고 목숨까지 앗아간 강원 산불로 수많은 이재민이 충격과 시름에 빠졌다. 강원 고성은 지난해 3월28일에도 전선 단락으로 산불이 발생해 수백억원의 재산 피해를 냈다. 이맘때 고성 인근 지역에는 가뭄 속에 ‘양간지풍’으로 불리는 서풍이 불어 조그만 전기 스파크에도 산불이 빈번히 발생한다. 재해방지·대응 시스템이 철저했다면 이번 산불도 발생하지 않았거나 효율적인 대처가 가능했을 것으로 전망된다. 결국 이번 산불도 강한 바람, 건조한 날씨, 야간 발생 등 ‘천재지변’으로만 치부할 수 없는 것이다. 전선 지중화와 초대형 산불진화 헬기 도입, 더 나아가 소방관 국가직화까지 ‘비용에 밀린 안전시스템’을 되돌아봐야 한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강원 전선 지중화율 8.3%…손 못 대는 근본 예방책=5일 한국전력 관계자에 따르면 한전은 이번 사건의 원인을 변압기와 개폐기도 아닌 연결 전선의 문제로 추정하고 있다. 전날 최초 화재신고가 ‘변압기 폭발로 인한 화재’로 들어와 노후 변압기 문제에 무게가 실렸지만 사고가 발생한 전신주에는 변압기가 아예 달려 있지 않은 것으로 확인됐다. 이 전신주에 달려 있는 개폐기에 바람에 날린 이물질이 끼어 아크(방전)가 발생한 것이 아니냐는 추측이 나왔다. 하지만 한전의 조사 결과 개폐기에도 이상이 없었고 오히려 그을음이 있는 전선 쪽에서 아크가 발생했을 가능성에 무게가 실리고 있다. 한 전기설비 전문가는 “모든 전기설비에는 스파크가 튄다”며 “바람에 날린 잎사귀가 전선에 붙어도 화재가 발생할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개폐기와 전선 모두 한전에 관리 감독 책임이 있다.
고성의 경우 봄철 산불이 빈번하다는 점을 미뤄볼 때 전기 발생 산불을 예방하기 위한 근본적인 대책은 ‘전신주 지중화’라고 전문가들은 설명했다. 지중화는 전선류를 땅에 묻거나 설치하는 방법으로 변압기·개폐기·전선 등을 지하에 매립하는 것이다. 특히 산간 지방의 경우 세세한 관리 감독이 어려운데다 바람에 이물질이 날려 폭발·방전 우려가 있는 만큼 지중화가 필요한 상황이다.
문제는 비용이다. 한전의 한 관계자는 “논밭 등 사람이 별로 없는 지역에 지중화를 하게 되면 일반적 전신주를 세우는 것보다 비용이 아홉 배 이상 든다”며 “투자를 하게 되면 전기요금을 올릴 수도 있어 신중히 생각해야 한다”고 말했다. 한전은 지방자치단체의 신청을 받아 비용을 절반씩 부담하는 방식으로 지중화 사업을 진행하고 있어 지역이 넓고 재정이 약한 강원도의 경우 사업 진척이 나지 않고 있다. 유동수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한전에서 제출받은 자료에 따르면 지난 2017년 6월 기준으로 강원의 가공 배전선로 지중화율은 8.3%에 그쳐 서울(58.4%)과는 50%포인트 넘게 차이가 났다.
재정이 부족해 안전이 흔들리는 상황에서 강원도도 다른 지자체와 마찬가지로 ‘현금 복지’ 정책에 열을 올리고 있다. 강원도는 올해부터 아기가 태어나면 4년간 월 30만원씩을 지급하는 ‘육아기본수당’ 정책을 도입했다. 김세연 자유한국당 의원이 보건복지부로부터 제출받은 ‘2018년도 사회보장제도 신설변경 협의내용’에 따르면 강원도가 지난해 신설한 복지사업은 총 63개로 전국 17개 광역자치단체 중 4위를 차지했다.
◇산불 진압 대책도 비용에 발목… ‘초대형 산불 진압 헬기’ 4대뿐=우리나라의 대형 산불은 대체로 건조한 날씨와 강풍이 일으키는 경우가 많다. 이번 산불도 건조주의보가 내려질 만큼의 가문 날씨와 봄철 영서지방에서 태백산맥을 넘어 부는 강풍인 ‘양간지풍’이 급속한 확산을 불렀다. 하지만 초속 15m 이상의 강풍이 불면 일반 산불진화 헬기는 뜰 수 없어 초대형 헬기 도입 사업이 2002년 시작됐다. 산림청이 보유한 초대형 헬기는 모두 4대로 연내 2대를 추가 도입할 예정이다. 그러나 연내 도입 예정인 초대형 헬기 이외에 추가 구입 예산이 확보되지 않은 상황이다. 이에 따라 대형 산불이 이번처럼 전국 곳곳에서 동시 다발적으로 발생할 경우 산불진화 대처에 어려움을 겪게 될 것으로 전망된다. 이 외에도 노후헬기 등을 중대형으로 교체하는 사업까지 추진하면 현재 1,700억원에 그치고 있는 연간 산불방지대책사업 예산이 2,500억원 이상으로 늘어나야 하지만 가로막혀 있는 상황이다.
◇전국 총출동해도…‘소방관 국가직화’도 비용 문제에 요원=이번 산불은 그야말로 ‘국가적 재난’이어서 지자체별로 분산돼 있는 소방 체계·예산 부담을 중앙정부 중심으로 일원화하는 ‘소방관 국가직화’ 정책에도 영향을 미칠 것으로 전망된다. 소방청은 이날 오전1시께 제주를 제외한 모든 지자체의 소방력과 장비를 동원했다. 산불을 끄기 위해 전국의 가용 소방인력이 총동원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강원소방본부로서는 해결할 수 없는 수준의 재난이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대규모 재난이 발생하는 상황에서도 99%의 소방 예산은 중앙정부가 아닌 지자체가 부담하고 있는 상황이며 지휘권도 일차적으로 지자체장에게 위임돼 있다.
소방청은 중앙정부가 비용 부담에 난색을 표하면서 신규 임용직에 대한 예산만 중앙정부가 부담하고 나머지 예산과 인사권·지휘권 등을 지자체에 남기는 나름의 절충안을 국회에 보고했지만 3월 임시국회에서도 소관 상임위인 행정안전위원회에서 논의조차 되지 못했다. 권은희 바른미래당 의원은 “신분의 소방 국가직화만으로는 직무나 업무의 통일성 등을 담보할 수 없다”며 “소방업무를 국가에서 관리하는 업무·인사의 일원화와 국가의 예산 부담 증가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변재현기자 대전=박희윤기자 humbleness@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