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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교 입학은 아이에게도 거대한 시험대지만 워킹맘에게도 적지 않은 고통을 줍니다. (엄마로서 뭔가를 해줄 수 있는) 절대적인 시간이 부족하다 보니 여기저기서 구멍이 나는 거죠.”
올해 딸아이를 초등학교에 입학시킨 중견기업 마케팅팀의 박지영(38)씨는 입학 시즌의 고충을 묻는 기자의 질문에 한숨부터 내쉬었다. 탄력근무제가 가능한 직장에 다니는 만큼 상대적으로 운이 좋은 케이스라고 하지만 오전에 아이의 등교를 도와주고 나면 이내 출근 시간이다. 지난 3월 중순께 총회가 열렸을 때도 팀장에게 아쉬운 소리를 해가며 어렵게 연차를 냈지만 같은 반 엄마들이 서로 반갑게 인사하면서 근황을 챙기는 것을 보니 이미 여러 번 식사나 티타임을 가졌던 것이 분명했다.
수줍음이 많은 박씨의 딸은 다행히 같은 유치원을 다녔던 친구가 있어 조금씩 적응하는 모습이지만 워킹맘인 박씨가 엄마 모임에 끼어 들기가 애매한 상황이었던 것이다. 유치원 때부터 알았던 엄마를 통해 총회 후 잡힌 저녁 모임에도 참석하면서 조금씩 안면을 텄지만 앞으로가 걱정이라며 울상이다.
“이미 다른 엄마들은 주말마다 인라인스케이트나 줄넘기 등 여자아이에게 맞춘 생활체육 프로그램에 팀을 짜서 다니고 있더군요. 남자아이들이 주로 하는 축구 모임이야 10명 이상 참여할 정도로 규모가 크지만 여자아이 모임은 기본적으로 4~5명의 소규모로 구성되는데다 폐쇄적인 성향도 강해 아예 처음부터 들어가지 못하면 6년 내내 겉돈다고들 하더군요. 이제 와 끼워달라고 하기도 민망하고 아직 못 들어간 엄마들을 모아 다른 모임을 만들기도 어려운 상황인 거죠. 벌써부터 딸아이는 단짝 친구가 주말마다 다른 친구들과의 모임을 가지면서 멀어진 것 같다고 엄마가 어떻게든 하라고 떼쓰는데 속이 말이 아닙니다. 상사에게 찍혀도 1년 치 연차를 모두 끌어다 쓸 걸 그랬나 봐요.”
하지만 그마저도 쉬운 것이 아니다. 실직 상태인 남편이 다시 일을 구할 때까지 ‘생활 전선’에서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 차라리 남편이 엄마들 반 모임에 대신 가줬으면 하다가도 “아빠가 집에서 노는 거 같다”는 얘기까지 나오면 낭패일까 싶어 말도 꺼내지 못하고 있다.
초등학교 3학년 아들을 키우는 대기업 계열사 영업팀의 한무선(39)씨는 아이가 입학할 때 워킹맘이라고 밝혔다가 불편했던 경험을 지금도 잊지 못한다. 그는 “워킹맘을 무조건 배제하는 것은 아니지만 상대적으로 부유한 동네일수록 맞벌이에 대해 색안경을 쓰고 보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면서 “어떤 엄마들은 ‘얼마나 남편이 무능하면 둘이 벌어야 하느냐’는 말을 아무렇지 않게 내뱉는다”고 말했다. 아이만큼은 교육 인프라가 잘된 곳에서 키우려는 마음에서 서울 강남구 대치동에 전세로 들어왔지만 막상 주변의 까칠한 시선 때문에 커뮤니티에 들어가지 못하는 상황이라는 것. 한씨는 “어떻게든 그들의 이너서클에 들어가고 싶어서 주말마다 아이의 친구들을 불러 정성껏 해 먹이고 모임에서 계산도 내가 하는 편”이라며 “나도 사람인데 치사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엄마 모임의 주류인 전업 엄마들과의 끈을 놓지 않으려면 이 방법밖에 없다”고 털어놓았다. 아이 담임선생님에 대한 평판이나 대처 방식부터 엄마들 사이에 입소문 난 학원 정보, 축구나 펜싱 등의 그루핑 등 엄마들의 네트워크에서 오가는 정보가 육아나 교육에 절실하기 때문이라는 설명이다. “아이가 특별히 학교에서 눈에 띄게 활동하거나 성격이 적극적인 스타일이 아니면, 더군다나 저학년일수록 엄마들이 만들어준 판에서 교우관계가 형성될 수밖에 없습니다.”
워킹맘들의 시각에서 보면 박씨나 한씨의 사례가 특별한 것이 아니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육아와 직장을 병행하는 워킹맘들이 겪고 있는 오늘의 현실이다. 맞벌이 비중이 높아지면서 워킹맘이 설 자리도 늘어날 것으로 기대를 모았지만 육아와 교육 문제만큼은 워킹맘이 해결할 수 있는 수위를 넘어섰다는 것이 공통된 시각이다. 단적인 예로 3월 입학 시즌에 맞춘 육아휴직 붐도 마찬가지다. 몇 년 전만 해도 사기업에 다니는 워킹맘들이 초1 입학 시기와 맞물려 육아휴직을 쓰는 일이 흔하지 않았지만 최근에는 육아휴직 사용이 일반화하면서 출산할 때 일부를 쓰고 3개월 정도는 초등학교 입학 시즌에 활용하는 이들도 늘고 있는 추세다. 육아휴직을 모두 소진한 최유진(41)씨는 올해 둘째 아이의 초등학교 입학에 남편의 육아휴직 찬스를 사용했다. 최씨는 “최근 매각 이슈가 있어 회사에서 연차도 자유롭게 사용할 형편이 되지 않는데 공무원인 남편이 이번 학기 동안 육아휴직을 사용하기로 했다”면서 “반 모임의 경우 대부분 저녁에 있기 때문에 퇴근하고 참석하고 남편이 오며 가며 나름 ‘세가 강한’ 전업맘과 친해져 핸드폰 번호를 따 놓고 내가 따로 안부 인사를 하는 식으로 관계를 만들었다”고 귀띔했다. 최씨는 “큰애를 키우면서 얻은 노하우라고도 할 수 있는데 이너서클에 들어갈 수는 없지만 적당한 관계를 만들어만 놓으면 비상 상황에 대처하기는 용이하다고 본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워킹맘이 죄책감을 가지면서 가사는 물론 육아와 교육, 엄마들과의 관계까지 완벽하게 구성하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모습이 바람직하지 않다고 입을 모은다. 특히 육아의 주된 주체이자 책임 소재를 엄마에게 두는 풍토가 문제라는 지적이다. 실제로 직장을 다니며 자녀를 돌보는 40대 기혼 여성이 가장 극심한 ‘시간빈곤(타임푸어)’에 시달리는 것으로 확인됐다. 일을 그만두면 빈곤층이 될 가능성이 높아 장시간 업무와 가사 노동에 내몰리는 셈이다. 또 한국의 20세 이상 성인 4명 중 1명은 1주일에 자유시간이 33시간도 안 되는 시간빈곤 처지에 놓인 것이다. 노동연구원이 2월 내놓은 ‘시간빈곤에 관한 연구’에 따르면 한국 성인들은 주당 평균 50.2시간의 자유시간을 갖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들을 일렬로 세웠을 때 정 가운데 있는 중위값(47.0시간)의 70% 이하일 경우 시간빈곤층으로 보면 한국 성인의 시간빈곤율은 24.6%로 나타났다. 성별로는 여성의 시간빈곤율이 25.4%로 남성(23.8%)보다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시간빈곤율은 남녀 모두 기혼자에게서 높게 나타났다. 기혼 남성(29.2%)과 기혼 여성(33.5%)의 시간빈곤율은 미혼 남성(15.6%)과 미혼 여성(15.0%)의 두 배 수준으로 증가했다. 특히 여성은 육아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 자녀가 없다면 시간빈곤율은 남녀 각각 16.2%, 14.2%로 미혼 남녀와 큰 차이가 없었다. 하지만 자녀가 있는 경우에는 남성이 29.8%, 여성이 37.0%로 시간빈곤율이 증가했다. 특히 6세 이하의 미취학 자녀가 있는 경우 남성의 시간빈곤율은 52.5%, 여성은 66.2%까지 상승했다.
홍승아 한국여성정책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한국 사회는 사회와 직장·학교 모두가 양육이나 교육의 1차적 책임을 엄마에게 부여하고 있다”며 “워킹맘에 대한 직장 내 태도, 사교육의 대명사로 엄마가 꼽히는 점 등이 단적인 사례”라고 지적했다. 이어 그는 “우리 사회의 일 중심적인 사회문화와 기업문화가 변화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며 우선 녹색어머니회가 아니라 녹색학부모회로 바꾼다거나 주간의 학부모회의를 주말이나 야간에 소집하는 식으로 워킹맘을 배려하면서 아빠들의 참석을 유도하는 실질적인 개선이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이수민기자 noenemy@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