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뒷북정치]기자 출신 총리의 기자수첩 사용법

이낙연 총리 깨알메모 적힌 수첩 포착돼
산불 상황·후속 조치 등 빠짐 없이 기록
이언주 의원, '수첩왕자냐' 저격 나섰지만
21년 기자 생활 습관 몸에 남아 있기 때문
SNS 통해 핵심 상황 실시간 전달도 눈길

지난 4일부터 강풍을 타고 강원도를 할퀸 화마에 강원도민은 물론 전국민이 발을 동동 굴렀던 주말이 지나가고 있습니다. 7일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에 따르면 특별재난지역으로 선포된 곳은 인제·고성군과 속초·강릉·동해시 등 5곳입니다. 또 이번 화재로 잿더미로 변한 산림 면적은 530㏊(530만㎡)로, 축구장(7,140㎡) 742개와 맞먹습니다. 주택 401채, 건물 100동, 창고 77동이 소실됐고, 국민 772명이 일시 대피했습니다. 무엇보다 안타깝게도 사망 1명·부상 1명 등 인명피해도 발생했습니다.

그럼에도 이번 산불은 정부의 총력 대응으로 과거 산불에 비해 조기 진화됐고, 피해 지역의 고통에 공감하는 국민들의 구호품과 성금도 답지하고 있습니다. 전국에서 사이렌을 울리며 강원도로 향하던 소방차 행렬과 사생활이 노출되는 체육관이 아닌 국가 연수원 등으로 이재민이 개별 수용되는 장면에 국가의 재난 대응이 달라졌다는 평가가 나옵니다.

이낙연 국무총리가 지난 6일 오전 정부서울청사 중앙재난안전상황실에서 열린 제2차 강원도 산불 관계장관회의를 주재하며 직접 작성한 당부사항을 적은 메모장을 보며 발언하고 있다./연합뉴스

이 과정에서 특히 주목받았던 사람이 있습니다. 이낙연 국무총리입니다. 지난 2017년 5월 말 국무총리로 취임한 직후부터 내내 매뉴얼과 현장을 중시했던 이 총리는 산불이 나자마자 긴급 지시를 내리고, 다음 날 일정을 모두 취소하고 재난 대응에 나섰습니다. 5일 오전 긴급 관계 장관회의를 연 후 곧바로 강릉 옥계면을 찾았고, 이재민들에게 “정부가 할 수 있는 것을 다하겠으니 마음 상하지 마시고 아프지 마시라”라고 말했습니다. 재난 상황에서 가장 먼저 떠오르는 행안부에 대한 지시는 물론 기상청에 바람 방향 파악까지 당부하는 모습도 인상적이었습니다.


정운현 국무총리실 비서실장이 지난 6일 페이스북에 공개한 이낙연 국무총리의 수첩 메모./출처=정운현 페이스북

6일에는 이 총리의 꼼꼼한 산불 관련 메모가 공개돼 화제가 되기도 했습니다. 이 메모는 화재 발생 3일째인 6일 오전 정부서울청사에서 제2차 강원도 산불 관계장관회의를 주재하는 과정에서 언론사의 카메라에 포착됐습니다. 이에 대한 여론의 관심이 커지자 정운현 총리 비서실장은 자신의 SNS를 통해 총리의 메모 8장 전체를 공개했습니다. 메모에는 임야나 주택, 건물 소실은 물론 통신장애, 잔불 정리와 뒷불 감시, 이재민 대책에 이르기까지 재난 발생 이후 필요한 조치들이 꼼꼼하게 적혀 있었습니다.

물론 이를 두고 야당 일각에서는 비난의 목소리가 나오기도 했습니다. 당 대표를 향해 ‘찌질이’ 발언을 서슴치 않았던 이언주 바른미래당 의원이 바로 등판했습니다. 이 의원은 “전 정권 때는 수첩공주라 비판하더니 수첩왕자는 괜찮습니까? 내로남불 끝이 안보인다”며 “문재인 정부는 자화자찬식 정치이벤트를 멈추고 대책과 원인 규명에 집중하라”고 자신의 페이스북에 적었습니다. 또 한편에선 우연히 메모가 노출된 건 그렇다 하더라도 굳이 모든 메모를 공개한 건 의도적인 게 아니냐는 지적도 나왔습니다.

진의는 알 수 없지만 총리실을 담당하는 기자로서 평소 이 총리를 지켜본 바로는 기자 출신인 이 총리는 평소에도 수첩을 들고 다니며 메모를 자주 합니다. 21년 기자 생활로 인해 굳어진 습관이라는 게 이 총리의 설명입니다. 실제 여러 국내외 발표 현장에서도 항상 메모장을 앞에 두고 궁금한 부분을 기록한 후 나중에 추가 질문을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번에 공개 된 수첩 역시 과거 몸 담았던 언론사의 기자수첩이어서 눈길을 끌었습니다.
구호금품 문의에 관련 전화 번호를 안내한 이낙연 총리의 트위터.

성금 집계 현황을 안내한 이낙연 총리의 트위터.

잔불이 정리된 7일이 되자 이 총리는 심지어 구호품 연락처와 성금 모금 현황까지 직접 안내했습니다. 이 총리의 SNS에 산불 피해 지역을 돕고 싶다는 국민들의 댓글이 줄줄이 달리자 전국재해구호협회, 대한적십자가, 사회복지공동모금회 등의 연락처를 직접 안내했습니다. 평소 기자들 사이에서 ‘실시간’급 소통이라 평가 받던 이 총리는 산불 진압 상황 및 후속 조치까지 직접 안내에 나섰습니다. 또한 공무원에 대해 쓴소리를 아끼지 않는 이 총리지만 이번 산불 진압 과정에 밤낮없이 매달렸던 공무원들에 대한 격려와 감사 인사도 잊지 않았습니다. 이 총리는 “소방인력 모두 수고하셨다”며 “산림청과 소방청 직원, 국군 장병, 지자체 공무원 여러분께 거듭 감사드린다”고 말했습니다.

이낙연 국무총리가 지난 5일 강원도 강릉시 옥계면에 방문해 피해 주민을 만나 인사하고 있다./연합뉴스

산불이 났는데도 골프를 치거나 재난 현장에서 의전을 강요하는 총리가 이제 없어져서 다행입니다. 하지만 아직도 상황 파악을 못하거나 갑질을 일삼는 사회 지도층은 여전히 많습니다. 그로 인한 사건·사고 등이 잊을 만하면 터져 국민들의 공분을 사는 게 현실입니다. 또 이번 산불이 과거에 비해 조기에 진압됐다고는 하지만 평소 부족했던 점이 곳곳에서 드러났습니다. 예를 들어 강원 산불의 원인으로 개폐기 주변 전선에서 생긴 불이 지목되는 가운데 한전이 화재를 사전에 예방할 유지보수 예산을 지난해부터 대폭 삭감한 것으로 밝혀진 점 등입니다.

지난 2005년 4월 강원 양양 산불 당시 천년 고찰 낙산사가 화마에 휩싸여 무너지고 있다./연합뉴스

14년 전 양양 산불 당시 천년고찰 낙산사가 속절없이 전소 된 것과 유사한 상황이 이번에 재연되지 않은 것도 천만다행입니다. 앞으로는 산불이 아예 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하지만 행여 다시 재난이 발생하더라도 지금보다 더 정확한 매뉴얼과 빠른 지시대응 체계로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길 기대해 봅니다. /정영현기자 yhchung@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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