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27일 서울 강서구 대한항공 본사에서 열린 정기 주주총회에서 우기홍 대한항공 부사장이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의 대표이사직 상실을 알리며 의사봉을 두드리고 있다. /연합뉴스
앞서 조 회장이 별세하기 12일 전에 열린 대한항공 주총에서 조 회장의 대표이사 연임 안건은 찬성 64.1%로 참석 주주 3분의2 이상의 찬성을 얻지 못해 부결됐다. 스튜어드십 코드(기관투자가의 수탁자 책임 원칙)를 내세운 국민연금의 반대가 결정적이었다. 이에 따라 조 회장은 지난 1999년 4월 대한항공 최고경영자(CEO)가 된 지 20년 만에 대표직에서 물러나게 됐다.
조 회장의 대한항공 경영권 박탈은 지난해 불거진 차녀 조현민 전 대한항공 전무의 이른바 ‘물컵 갑질’이 결정타로 작용했다는 분석이 나온다. 특히 ‘물컵 갑질’ 사건 이후 사정 당국이 총동원돼 조 회장 일가에 대한 전방위 압박에 나선 것도 조 회장에게 극심한 스트레스로 작용하며 병세를 악화시켰을 것이라는 지적이다.
2014년 조 회장의 장녀인 조현아 전 대한항공 부사장의 이른바 ‘땅콩 회항’ 사건 이후 벌어진 ‘물컵 갑질’ 사태로 대한항공은 국민들의 거센 비난에 직면해야 했다. 여기에 조 회장의 부인인 이명희 전 일우재단 이사장이 운전기사와 가정부 등에게 폭언을 일삼았다는 논란마저 불거지며 대한항공의 ‘오너 리스크’가 사회적 이슈로 떠올랐다. 검찰과 경찰은 물론 국세청·관세청·공정거래위원회 등 사정기관이 총동원돼 조 회장 일가의 갑질 논란과 외국인 가사도우미 불법고용, 밀수, 횡령 등에 대한 전방위 수사에 나서면서 그룹 경영은 크게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최근 1년 동안 대한항공 등 한진 계열사는 총 18회의 압수수색을 받았으며 그간 조 회장과 이 전 이사장, 조 전 부사장, 조 전 전무 등이 포토라인에 선 횟수도 열 차례를 훌쩍 넘는다. 법조계의 한 관계자는 “검찰과 경찰 외에 공정위·국세청·관세청 등이 단일 기업을 대상으로 일사불란하게 조사 및 수사에 나선 것은 전례가 없는 일”이라며 “단순 기업 수사를 넘어 정치적 의도를 의심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고 지적했다.
조 회장이 평창동계올림픽 조직위원장을 맡아 대회 준비에 전념하다 타의로 조직위원장에서 물러나게 된 것도 큰 충격으로 작용했다는 후문이다. 조 회장은 평창동계올림픽 개막을 640여일 앞둔 2016년 5월 긴급한 그룹 현안을 수습한다며 조직위원장을 사퇴했으며 뒷날 그의 사퇴에 청와대 압력이 작용한 것으로 드러났다.
재계의 한 관계자는 “조 회장이 회사 경영보다 더 힘을 쏟았던 평창동계올림픽 조직위원장 자리에서 중도 하차한 뒤 힘들어했던 것으로 안다”며 “이후 한진해운 파산, 가족들의 갑질 논란에 대한항공 대표이사직 박탈 등 안 좋은 일들이 연쇄적으로 일어나며 스트레스를 견디기 어려웠을 것”이라고 말했다,
조 회장의 별세에 경영계의 애도도 이어졌다. 전국경제인연합회는 이날 “한국 항공·물류 산업의 선구자이자 재계의 큰 어른으로서 우리 경제발전을 위해 헌신한 조 회장이 별세한 데 대해 깊은 애도를 표한다”며 “대내외적으로 어려운 시기에 조 회장의 별세는 재계를 넘어 우리 사회에 큰 손실”이라고 밝혔다.
한국경영자총엽회도 “조 회장은 대한항공을 글로벌 항공사로 키웠고 항공 산업과 경제발전에도 크게 기여했으며 평창동계올림픽 조직위원장을 역임하는 등 국가적 행사에도 공로가 많았다”며 “경영계는 고인의 기업가정신과 경영철학, 국가 경제발전을 위한 헌신을 기려나갈 것”이라고 전했다.
정치권에서는 국민연금이 조 회장의 경영권 박탈에 주도적 역할을 한 데 대한 비난의 목소리도 나왔다. 홍준표 전 자유한국당 대표는 이날 페이스북을 통해 “국민의 노후생활을 보장하라고 맡긴 국민연금을 악용해 기업을 빼앗는 데 사용해 연금 사회주의를 추구하던 문재인 정권의 첫 피해자가 오늘 영면했다”고 지적했다.
/이재용기자 jylee@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