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일 대한항공 서소문 사옥 안내판에 일우재단과 한진 등 계열사의 층이 표시돼 있다.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의 별세 후 조원태 사장 등 오너 일가들이 막대한 상속세를 어떻게 낼지 이목이 집중되고 있다./이호재기자
올해 70세인 자동차 부품 분야 중견기업 회장 A씨는 최근 기업 승계를 포기한 회사를 골라 사는 사모펀드(PEF)가 있다는 소식에 눈이 번쩍 뜨였다. 회사를 펀드에 팔고 적당한 선에서 엑시트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A 회장도 자식들에게 회사를 물려주고 싶었다. 그러나 그러려면 상속세 최고 세율 50%에 최대주주 할증 30%까지 적용받아 최고 65%의 상속세를 내야 자식들에게 주식을 물려줄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게다가 수년 전 회사 매출이 3,000억원을 넘기면서 가업상속공제 대상에서 제외돼 세제 혜택도 받지 못한다. A 회장은 “요즘 PEF가 대주주인 제조업체가 계속 늘어나 사업을 포기한다는 마음의 부담도 적어졌다”며 “한국 자동차 산업이 갈수록 어려워지는 것을 감안하면 승계를 포기하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엄격한 상속·증여 관련 세금 문제로 승계를 포기하는 경우는 이 밖에도 많다. 9일 관련 업계에 따르면 락앤락은 상속세 부담을 고려해 지난 2017년 홍콩계 PEF에 지분을 매각했고 고무의류 기업 유니더스는 창업주 아들이 세금 분할납부를 신청하고 경영 의지를 밝혔지만 결국 세금 문제로 2017년 주식을 PEF에 팔았다. 유영산업·우리로광통신·에이블씨앤씨 모두 상속세 부담으로 대주주가 PEF에 회사를 매각한 경우다.
강호갑 한국중견기업연합회장은 최근 “상속세 최고세율이 65%인데 이래서야 100년 장수기업이 생겨날 수 있겠냐”면서 “금융투자 업계에서 저를 찾아와 승계를 포기한 기업 좀 소개해달라고 할 정도”라고 씁쓸해 하기도 했다.
자산 규모 5,000억원 이하 또는 연 매출 3,000억원 이하 중견·중소기업은 가업상속공제 제도를 이용할 수 있지만 요건이 까다로워 관련 법을 개정해 각종 요건을 완화해야 한다는 요구가 끊임없이 나온다.
가업상속공제는 10년 이상 경영한 기업은 200억원, 20년 이상 300억원, 30년 이상이면 500억원을 상속재산 중에서 공제해주는 제도다. 혜택을 받은 사람은 10년간 해당 가업용 자산의 20% 이상을 처분할 수 없고 상속인이 대표이사로 종사해야 한다. 10년간 주 업종을 변경할 수도 없다. 또 사업을 1년 이상 휴업·폐업할 수 없고 정규직 직원 수가 상속 시점의 100%(중견기업은 120%)에 미달하면 안 된다. 업황이 급변하고 투자 유치, 인수합병(M&A), 지분 교환, 구조조정 등이 일상인 현재의 기업 환경에서는 지키기 어려운 조건이다. 사후 조건을 어기면 공제받은 상속세를 추징당한다.
그러다 보니 제도의 실효성이 떨어진다는 지적이다. 실제로 가업공제 이용 건수는 2013년 70건, 2014년 68건, 2015년 67건, 2016년 76건 등 정체된 상태다. 최근 공제 요건을 완화하고 공제액을 확대하는 내용의 ‘상속세 및 증여세법 일부개정법률안’이 여러 건 발의된 상태지만 국회 논의는 지지부진하다.
중소기업중앙회 관계자는 “선대가 이루지 못한 꿈을 후대가 이뤄나가는 과정에서 고용이 창출되고 기업이 국가에 기여하게 되는 것”이라면서 “그러나 한국은 기업 상속을 개인 부의 이전으로 보는 인식이 있어 안타깝다”고 말했다. 그는 또 “말로는 100년 기업을 키우자고 하지만 100년 기업이 되려면 4대까지 내려가야 하는데 현재 상속세 구조로는 불가능하다”면서 “계획에 의한 승계가 가능한 방향으로 법을 개정해 기업들이 미리 대비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류기정 한국경영자총협회 전무도 “기업 승계 문제를 단순히 ‘부의 대물림’이나 ‘불로소득’이라는 부정적 관점에서 보지 말고 일자리 창출 및 유지, 경영 노하우 계승 등 사회·경제적 측면에서 바라볼 필요가 있다”고 설명했다.
조양호 회장 별세 이후 한진그룹의 지분 상속에 적용되는 최대주주 주식 할증 평가도 문제로 지적된다. 이 제도는 경영권이 있는 최대주주 등의 주식을 상속받을 경우 경영권 프리미엄을 고려해 상속세율을 10~30% 할증하는 것이다. 명목상 최고 50%인 우리나라의 상속세율이 실제로는 65%까지 높아지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가운데 최대주주 주식을 일률적으로 할증 평가해 경영권 승계에 부담을 지우는 나라는 우리나라가 유일하다. 이에 따라 경영계에서는 지배주주 주식 할증 평가를 폐지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재계의 한 관계자는 “상장기업의 경우 주식 가격에 이미 경영권 프리미엄이 포함돼 있으므로 현행 주식 할증 평가 규정은 경영권 프리미엄을 중복 할증하는 것으로 문제가 있다”고 지적했다. /맹준호·이재용기자 next@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