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상 최초로 10일(한국시간) 오후 공개된 블랙홀의 실제 모습. 한국을 비롯한 주요국 연구진으로 이뤄진 ‘EHT’프로젝트를 통해 관측된 처녀자리 블랙홀 ‘M87’이다. /사진제공=EHT
그동안 이론으로만 입증됐던 블랙홀이 드디어 베일을 벗었다. 전 세계 주요 전파망원경들을 네트워크로 연결해 지구만 한 크기의 단일망원경처럼 활용한 덕분에 가능하게 된 블랙홀의 실제 모습 관측 결과다. 중력과 시공간의 관계를 설명한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의 일반상대성이론 발표를 계기로 블랙홀의 존재 가능성이 착안된 지 약 104년 만의 쾌거다.
이번 관측 결과는 10일 오후 일명 ‘사건 지평선 망원경(EHT)’ 프로젝트의 국제연구진에 의해 공개됐다. 연구진은 “초대질량 블랙홀(M87) 관측에 성공했다”고 밝혔다. 우리나라를 비롯한 미국·유럽·일본 등 주요국 13개 기관 연구진이 참여한 EHT는 전 세계 8개 우주관측소의 전파망원경들을 연결했다. 마치 여러 망원경을 이어붙여 총 지름 1만㎞에 달하는 초대형 전파망원경을 건설한 것과 같은 효과를 낸 것이다. 덕분에 단일 천체망원경으로는 현존 최고 성능을 지닌 미국의 허블 천체망원경보다 1,000배 이상의 해상도(분해능)를 가져야 확보할 수 있는 우주 관측 영상을 얻어낼 수 있었다. 프로젝트 총괄단장을 맡은 쉐퍼드 도엘레만 하버드 스미소니안 천체물리센터 박사는 “우리는 인류에게 최초로 블랙홀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며 “200명이 넘는 과학자들의 협력으로 이뤄진 이례적 과학 성과”라고 소개했다.
처녀자리에 위치한 블랙홀 M87‘이 중력과 주변의 빛 상태에 따라 다양한 크기와 형태로 형태가 바뀌어 관측되는 모습. 10일(한국시간) 오후 ‘EHT’프로젝트 연구진의 발표를 통해 공개된 영상이다. /사진제공=EHT
당초 EHT가 관측후보 대상으로 정한 블랙홀은 2개였다. 우리 은하계의 궁수자리 가장자리에 위치한 ‘궁수자리A*’ 블랙홀과 다른 은하계의 처녀자리에 위치한 초거대 블랙홀 ‘M87’였다. 이중 궁수자리A*는 여타 블랙홀들보다 비교적 가까운 약 2만6,000광년 떨어졌기 때문에 관측상 유리했지만 10일 발표에선 결과가 공개되지 않았다. 그에 비해 M87은 지구로부터 5,500만광년 떨어져 있지만 워낙 거대해 EHT 연구진이 관측하는 데 성공할 수 있었다. 그 질량은 태양의 65억배다.
이번에 EHT가 발표한 사진과 자료는 정확하게는 블랙홀 본체라기보다 블랙홀의 경계면인 ‘사건 지평선(event horizon)’ 윤곽이다. 이를 ‘블랙홀의 그림자’라고 EHT 연구진은 표현했다. 블랙홀 자체는 워낙 강력한 중력으로 빛마저 삼켜버리기 때문에 현존하는 어떠한 광학·전자파 망원경으로도 볼 수 없다. 대신 블랙홀로 들어가기 직전 경계에서 물체가 마지막 비명을 지르듯 에너지 입자를 내뿜기 때문에 이 찰나의 빛을 전파망원경이 관측하게 되는 것이다. 혹은 블랙홀 뒤편의 밝은 천체로부터 비추어진 빛이 사건 지평선 외곽을 따라 마치 후광처럼 작용해 블랙홀의 그림자를 보여주기도 한다. 그 결과 블랙홀의 중심부는 어둡고, 경계면 바깥은 분출된 에너지나 후광효과로 밝게 회오리치는 영상이 망원경에 포착되는 것이다.
처녀자리에서 실제 관측된 블랙홀 ‘M87(오른쪽)’와 다른 천체들의 크기 비교 이미지. 지름이 380억㎞에 달해 지름 140만㎞에 달하는 우리의 태양(〃 세번째)은 난쟁이처럼 보인다./사진제공=EHT
막스플랑크연구소의 제이슨 덱스터 박사가 시뮬레이션한 ‘궁수자리A*’ 블랙홀의 모습. 빛마저 빨아들여 어두운 블랙홀 중심부의 외곽은 분출되는 에너지로 밝게 회오리치듯 보인다. /사진제공=제이슨 덱스터 박사
EHT에 참여한 한국천문연구원의 손봉원 박사는 이번 성과에 대해 “일반상대성이론에 대한 궁극적 증명”이라고 말했다. 같은 연구원의 정태현 박사는 “아인슈타인의 뒤를 이어 블랙홀을 비롯한 중력장 이론의 기반을 닦은 아서 애딩턴, 스티븐 호킹 등의 연구 성과도 입증하게 됐다”고도 덧붙였다.
사상 첫 블랙홀 촬영을 위해 참여한 8개의 세계 전파망원경 관측소. /사진제공=EHT
칠레 고원지대에 건설된 전파망원경 ALMA의 전경. 사상 첫 블랙홀 관측 프로젝트에 동참했다. /사진제공=ESO
이 같은 평가의 배경을 이해하려면 중력에 대한 탐구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1915년 발표된 아인슈타인의 일반상대성이론이 시사하는 것은 물체의 질량이 시공간을 휘게 해 중력장을 형성할 수 있다는 것이다. 독일의 천문학자 카를 슈바르츠실트는 일반상대성이론에 영감을 받아 1915년 중력장 이론의 방정식 답을 풀어냈다. 이것을 그림으로 구현하자면 마치 공간이 깔때기처럼 구부러져 질량이 큰 중심부로 중력장이 작용해 물체가 빨려 들어가는 모습을 상상하면 된다. 충분한 질량을 지닌 물체가 중력장을 형성하면 주변의 물질들이 깔때기에 빨려들듯 중력에 이끌려간다는 것을 시사하는 대목이다. 이 같은 이론과 방정식 풀이를 실증한 게 영국 천문학자 애딩턴이다. 그는 1919년 개기일식을 관찰해 달의 중력으로 지구에 도달하는 태양 빛이 휜다는 것을 증명해냈다. 이후 천문관측 기술의 발달로 블랙홀에 버금가는 중력을 지닌 중성자별이 발견됐고 1969년에는 미국 과학자 조 휠러가 처음으로 ‘블랙홀’이라는 이름을 사용했다. 후진 연구자들의 블랙홀 연구가 가속화되는 가운데 호킹 박사가 블랙홀은 에너지를 빨아들일 뿐 아니라 분출하기도 한다고 주장하면서 블랙홀의 형태와 역학에 대한 기존의 이론이 전면 수정됐다.
‘궁수자리A*’ 블랙홀이 자리 잡은 지점을 나사의 찬드라X레이망원경이 관측한 영상. 사각형으로 확대관측한 지점이 블랙홀이 자리 잡은 곳이다. /사진제공=나사
블랙홀의 실체 확인이 과학뿐 아니라 우리의 실생활에 어떤 영향을 줄지는 아직 가늠하기 어렵다. 아주 먼 미래에는 마치 공상과학영화처럼 블랙홀을 이용한 우주 항해(워프항법)가 가능할 것이라고 보는 낙관론도 있으며 보다 실용적으로는 블랙홀과 같은 물리적 난제를 관측하고 분석하는 분광학과 전자기공학·물리학의 노하우가 축적돼 통신이나 전자기공학 등에 유용하게 활용될 수 있다는 의견도 있다. 정 박사는 “우리가 현재 일상에서 활용하는 와이파이도 원류를 따지면 천문 관측을 위한 과학연구와 기술탐구 과정에서 파생된 것”이라며 “천체물리학은 기초과학이지만 그 기술적 파급력은 무궁무진하다고 본다”고 평가했다.
이번 블랙홀 관측결과를 담은 6편의 논문은 10일 미국 천체물리학술지 ‘레터스’ 특별판에 게재됐다. 연구에는 한국천문연구원 연구자 8명이 참여했다. 아울러 우리나라가 운영 중인 한국우주전파관측망(KVN)이 관측 및 분석에 기여했다. /민병권기자 newsroom@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