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람] 한준호 새로지음 이사장 "노숙자에서 아나운서·靑행정관까지...용기가 내 삶을 바꿨다"

제대 후 집안사정으로 서울역 전전
"일할 곳 많다" 충고에 정신이 번쩍
방학때면 돈 아끼려 주유소서 숙식
등록금 생활비 직접 벌어 대학 졸업
2평 짜리 아이스크림 가게 운영도
한번 꿈 정하면 끝까지 밀어붙여야
지금 흙수저 청춘들에게 필요한 건
내 생각도 옳을 수 있다는 자기확신
지역재생 크리에이터로 또다른 변신
끼많은 청년들 일자리 만드는게 목표


‘한국거래소·MBC·청와대’ 한준호 새로지음발전소 이사장이 거친 이력들을 보면 그는 한마디로 ‘엄친아’다. 여기에 아이큐 163의 멘사(Mensa) 회원, 준수한 외모와 MBC 아나운서로 다져진 언변까지. 어느 것 하나 빠질 것 없는 ‘완벽함’을 가진 그가 지역과 청년·마을을 재생시키는 프로젝트 사업에 나섰다. 새로지음 이사장. ‘거래소+MBC+청와대’ 이질적인 경험들을 총화시켜 ‘크리에이터(creator)’의 본색을 드러낸 그의 새 명함이다.

이처럼 남부러울 것 없는 엄친아가 서울역 앞에서 노숙생활을 했다는 사실은 놀랍다. 제대 후 돌아온 고향 집 대문은 커다란 자물쇠로 잠겨 있었고 부모와는 연락이 닿지 않았다. 빚보증을 잘못 선 아버지를 주변에서는 모른 척했다. 한 이사장은 일단 서울로 돌아왔다. 직전까지 지냈던 군부대가 서울에 있었다. 그래도 낯익은 곳이라고 생각하며 서울역에 내렸지만 갈 곳이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수중에 돈은 얼마 없고 서울역에 앉아 있는데 뭘 해야 할지 아무것도 생각이 나지 않았어요. 초봄이라서 저녁이 되니 얼어 죽을 것처럼 추웠어요. 지하도로 내려가 어디든 끼여 잠을 청했지만 잠이 오나요. 그렇게 며칠째 멍한 상태로 시간만 흘렀어요.” 한 이사장은 “일주일쯤 지났을까. 이름 모를 아저씨 한 분이 저에게 성큼 다가왔다”고 말하고 서울역을 바라봤다. 새로지음은 공교롭게도 서울역과 마주한 서울스퀘어에 자리를 잡고 있다. 군복 차림의 스물두 살 한준호가 어딘가 서 있는 듯 그는 얼굴이 붉어졌다. “아저씨는 며칠째 굶고 있는 제가 안쓰러웠는지 무료급식소에 데려갔죠. 군복 차림의 장정이 거기서 밥을 먹겠다고 줄을 서 있으니 너무 민망했어요. 부끄러웠고…. 아저씨는 ‘자식 같아서 하는 말인데 벼룩시장 같은 데라도 찾아봐. 일할 곳은 얼마든지 있다’고 말하고 사라졌죠. 번쩍 정신이 들었어요. 돈을 벌자.”


그렇게 찾은 곳이 서울 방배동의 신문배급소. 숙식을 제공한다는 말에 앞뒤 가리지 않고 그곳을 선택했다. 오전3시30분에 일어나 매일 신문 200부를 돌리며 10개월여 ‘뜨내기’들과 숙식을 같이했다. 그 사이 국내 모 항공사 고졸 사원에 지원해 계약직 직원이 됐다. “저는 꿈이 없었어요. 대학도 갈 생각이 없었고. 항공사에서 제가 했던 일은 조종사 인사기록 카드를 수기로 작성하는 단순 업무였죠. 사람들의 인적사항을 기계적으로 정리하다가 문득 조종사들의 전공이나 대학이 다양하다는 걸 알았어요.” 그는 조종사라는 꿈을 조심스럽게 품기 시작했다. “그쯤 호감 가는 여자 분이 뭐랄까, 저 같은 ‘하찮은’ 사람도 꿈이 있냐는 식의 대꾸를 했어요. ‘대학도 나오지 않는 당신이? (나를 좋아해?)’라는 투의 말에 꿈을 구체화시켜야겠다는 어떤 ‘오기’가 생겼죠.”

대학 합격 후에도 한 이사장은 대학생이 누리는 의례적인 특권을 한 번도 누리지 못했다. 등록금을 벌어야 했고 생활비를 스스로 충당해야 했다. 부모와 다시 만났지만 지원을 받을 형편은 아니었다. “과외를 정말 열심히 했어요. 방학이 되면 하숙비를 아끼려고 숙식을 제공하는 압구정 근처 주유소로 거처를 옮겼죠.” 공부를 하면서도 돈을 벌어야만 살아갈 수 있는 한 이사장의 상황을 과외 학생의 부모가 눈치챘다. “과외 학생 부모님이 여기저기 과외 다니면서 시간 허비하지 말고 사업을 하라고 돈을 툭 내주신 거예요. 사위를 삼고 싶으셨나 봐(웃음).” 물론 초기자금은 빌려주는 형태였다. 운이 좋았다. 이대 앞에서 차린 2평 남짓한 아이스크림 가게는 입소문이 났다. 그 덕분에 전세 자취방을 얻을 수 있었다. 데이콤ST와 지금의 한국거래소인 코스닥증권시장 등 소위 말하는 ‘신의 직장’을 골라 다니며 가정을 일궜다. 최초의 꿈인 조종사와는 인연이 닿지 않았지만 그의 말대로 시험 운이 참 좋았다. 코스닥증권시장에서 애널리스트를 하던 중에 시황방송을 하게 됐다. ‘방송’은 그에게 찾아온 제2의 도전이었다. 지난 2003년 MBC 입사 당시 이긍희 사장이 면접을 끝낸 뒤 “사고는 한준호가 칠 것 같다”며 필기 최고점자를 젖혀놓고 그를 낙점했다.


MBC 생활은 그의 책 ‘말할 수 있는 비밀’에서 확인해볼 수 있었다. ‘손석희 선배와 첫 대면을 하게 됐다. 좁다란 방의 창가 쪽에 자리를 잡고 앉은 선배는 간단하게 질문을 던졌다. “뉴스 리딩은 다른 사람들이 가르칠 테고 내 수업은 인터뷰니까…. 너희 둘, 인터뷰가 뭐야?” 솔직히 그렇게 두서없고 갑작스러운 질문이 있을까. 동기와 둘이서 동문서답을 하자 선배의 답변이 이어졌다. “인터뷰는 묻는 게 아니고 듣는 거야. 들으려고 그 사람에 대해 조사하는 것이고. 다만 질문을 하고 듣는데 궁금한 것이 있으면 그냥 넘어가지 말고 준비된 것을 다 버리더라도 꼼꼼하게 짚고 넘어가야 해. 이게 내 수업의 전부야. 자, 이제 인터뷰란 뭐라고?” “네, 묻는 게 아니고 듣는 것입니다” 그러자 선배는 웃으며 “잘 배웠네. 그리고 어떤 프로그램을 맡든 죽을 듯이 열심히 해. 매일 열심히 해야 살아남아”라는 말을 남기고 짧은 수업을 마쳤다.’

지난해 MBC를 관두고 청와대에 들어간 한 이사장을 보고 세간에서는 ‘정치’를 하려는 수순이라며 수군거렸다. 그는 “정치를 마다할 이유는 없다”면서도 “틀에 박힌 수순 밟기는 없다”고 잘라 말했다. 이어 “청와대에 추천되면 인사검증을 해서 들어가기는 해도 저처럼 일반 회사처럼 면접을 보고 들어간 사람은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누군가의 뒷배나 추천이 아니었다는 말이다. 그를 청와대까지 불러들인 것은 뜻밖에 한중 자유무역협정(FTA)이었다. “당시 모 방송사 프로그램을 중국에 수출하기로 했는데 그 회사가 5회까지 연출하는 과정을 중국 측이 모두 촬영해서 6회부터는 우리 기술력이 필요 없게 된 거예요. 수출은커녕 우리 콘텐츠만 노출시키고 빼앗긴 셈이 됐죠. 한중 FTA가 체결되면 방송정책이 단단해야 한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래서 자료를 찾아보기 시작했죠.” 개인적인 호기심과 사명감에서 시작된 한중 FTA 방송정책 보고서는 2013년 방송통신위원장상을 받을 만큼 정부가 놓친 방송 부문 FTA 정책을 보완하는 전략으로 활용됐다.


‘죽을 듯이 열심히 하라’는 손석희 현 JTBC 사장의 당부 이전에 한 이사장은 이미 죽을 듯이 열심히 살아온 인생이었다. “흙수저로 발악을 해왔잖아요. 힘든 과정에도 목표를 세우면 끝까지 무조건 밀어붙였어요.” 개인 보고서로서는 한계가 있다는 생각을 한 것도 같은 맥락이었다. 그는 국내 대학 가운데 관련 전문학과와 지도교수를 직접 찾았다. 가톨릭대 글로벌융합대학원 글로벌한류비즈니스학과에 문을 두드렸다. “한중 FTA 전후로 방송시장의 변화에 대한 대응책을 공부하고 논문을 쓰고 싶다고 요청했어요. 물론 장학금도 달라고 했죠(웃음).” 2015년 2월 관련 논문으로 석사를 받았다. 방송통신위원회에서 연락이 왔고 차관회의에서 브리핑도 했다. 한 이사장의 노력으로 한중 FTA 방송정책은 보완될 수 있었고 2015년 공식 발효됐다. 이를 알아본 사람이 윤영찬 전 청와대 국민소통수석이었다. “지난해 9월께 한 시간가량 면접을 봤어요. 넷플릭스에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지, 방송사 중간광고 허용 문제의 접근 방법 등을 물으셨고, 수석의 정책보좌관으로 청와대에 들어가게 된 거예요. 물론 수석의 정책보좌관으로서 윤 수석님이 청와대를 나가실 때 맞춰서 저도 자연스럽게 청와대 생활을 마무리했습니다.”


짧은 청와대 생활이었지만 그는 정부 주도 정책의 한계를 느꼈다고 말했다. 정부와 민간이 연계된 사업의 필요성이 절실하다고 봤다. “재건이 아닌 재생을 시키는 게 목표예요. 솔직히 실질적인 사업을 하려면 자금을 지원받아서 건물을 뜯어고치는 게 제일 쉬워요. 하지만 콘텐츠를 집어넣는, 말하자면 소프트웨어를 삽입하는 일은 민간이 주도해야 합니다.” 이어 그는 “재건을 할 경우 젠트리피케이션이 발생하고는 하죠. 그런 상업적인 재건을 피하면서 지역의 정체성을 살리고 ‘끼’ 넘치는 청년들이 마음껏 자기 역량을 발휘할 수 있는 공간의 활용, 그래서 자연스럽게 일자리 창출로 연결되는 과정을 만들어 내는 게 ‘새로지음’의 역할입니다.” 불안도 사실 크다. 하지만 그는 올해 초 펴낸 ‘말할 수 있는 비밀’에서 성공 가능성의 비기를 언급했다. 책을 직접 읽어야 비밀이 풀리지만 작은 힌트를 주자면 ‘용기’다. “용기란 한자 그대로 겁내지 않는 기개예요. 학생들이 가장 힘들어하는 부분도 바로 ‘나설 용기’였죠. 남 앞에서 자신의 생각을 펼치는 것은 내 생각도 옳을 수 있다는 용기에서 비롯됩니다. 꿈을 이루려고 노력하는 모든 이들이 용기를 내기를 응원합니다.”
/송종호기자 joist1894@sedaily.com 사진=오승현기자


◇He is…

△1974년 전주 △1996년 연세대 생활디자인학과 △1999년 데이콤ST △2000년 코스닥증권시장(현 한국거래소) △2003년 MBC △2009년 한국외대 국제지역대학원 동남·남아시아학과 △2011년 싱가포르경영대 국제경제 △2015년 가톨릭대 글로벌한류비즈니스학과 석사 △2018년 청와대 국민소통수석실 행정관 △2019년 새로지음발전소 이사장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