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 백남준을 만나다] 동서양 경계 허문 '위성예술'...한국을 세계 문화 주연으로 세우다

<5>'바이바이 키플링' 그리고 '세계와 손잡고'
86 아시안게임엔 '바이 바이 키플링'을
88 올림픽 땐 '위성쇼 3부작' 완결편
'세계와 손잡고' 선보이며 지구촌 전파
굿판·사물놀이 공연·제사 퍼포먼스 등
위성 도구 삼아 지구위에 그림 그리듯
동서문화 조화·세계 속 코리아 강조

백남준이 1986년10월5일 생방송으로 공개한 ‘바이바이 키플링’의 한 장면으로 일본 도쿄 아크힐즈 플라자 야외무대에 오른 백남준이 ‘비디오 볼’ 퍼포먼스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백남준이 1986년10월5일 생방송으로 공개한 ‘바이바이 키플링’은 동서양은 본질적으로 다르며 서로 만날 수 없다는 키플링에 반박하는 의미를 담고 있다

백남준이 1986년10월5일 생방송으로 공개한 ‘바이바이 키플링’ 중 한국인 무당 최희아의 굿 장면.

“오, 동양은 동양이고 서양은 서양이니 절대 만나지 못하리라. 하늘과 땅이 신의 위대한 심판 앞에 설 때까지 그럴 것이니, 그러나 세상의 끝에서 온 두 강자가 대면하는 날에는 동서양도, 국경도, 인종도, 출신성분도 없으리라.”

늑대들과 살아가는 야생소년 모글리를 주인공으로 한 ‘정글북’의 작가이자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러디어드 키플링(1865~1936)이 쓴 시 ‘동양과 서양의 노래(The Ballad of East and West)’다. 제국주의적이고 인종차별적이며 극히 보수적인 키플링의 이 짤막한 시가 백남준에게는 지독히 거슬렸다. 동양과 서양의 정신세계를 상극처럼 묘사했으니 말이다. ‘우주 오페라’로 불렀던 위성예술의 첫 작품인 1984년작 ‘굿모닝 미스터 오웰’을 통해 전자 미디어가 독재의 도구로 쓰일 것이라 예견했던 소설 ‘1984’의 오해에 작별을 고한 백남준은 1986년 서울에서 열린 아시안게임을 염두에 두고 두 번째 위성 쇼 ‘바이 바이 키플링(Bye Bye Kipling)’을 구상한다. 키플링의 착각에 영원한 이별을 통보하며 ‘화합의 정신’을 강조한 작품을 TV 속에서 꽃피웠다.

백남준의 ‘바이 바이 키플링’은 뉴욕의 공영방송 WNET가 현지시각 1986년 10월5일 오후9시30분부터 1시간30분 동안 생방송을 제작했고 미국 내 공영방송 네트워크를 통해 전파를 탔다. 1986 아시안게임이 한창인 서울의 마라톤 경기 시간에 맞췄기에 우리 시각으로는 그날 오전10시에 시작됐다. 일본의 아사히방송은 우리보다 3시간 뒤인 이날 낮1시부터 녹화방송을 내보냈다.

방송사 로고 직후 선보인 후 첫 장면은 한국의 전통 북춤과 장구 공연이었다. 사전에 촬영해둔 것을 ‘빨리 감기’로 보여주니 시작부터 박진감 넘쳤다.

“뉴욕·도쿄·서울에서 생방송으로 전해 드립니다. 위성을 통해서 음악·예술·스포츠를 함께 즐겨보겠습니다. 손을 뻗어 미래를 만져 봅니다. 미래에게 인사하며 키플링에게는 작별 인사를 전해요.”

비틀즈의 ‘컴 투게더(Come Together)’를 배경으로 사회자의 목소리가 흐른다. 화면으로는 키스해링의 드로잉 퍼포먼스가 펼쳐진다. 뉴욕의 진행자 딕 카벳은 “러디어드 키플링이 ‘동양은 동양이고 서양은 서양이니, 그 둘은 절대 만나지 못하리라’라고 한 그 생각을 잠시 보류하라고 얘기해야겠다”면서 “약간의 기술만 있으면 그 생각을 완전히 바꿀 수 있을 것 같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동양과 서양이 기술을 배경으로 분명 만날 수 있다는 것, 작가 백남준의 의도가 이 한마디에 압축됐다.

뉴욕의 진행자는 “니혼 구다사이(일본 나와주십시오)”를 외쳐 도쿄의 아크 힐즈 플라자에 설치된 무대를 연결한다. 곧이어 화면은 서울 여의도의 국회의사당을 비추며 한국에 있는 진행자 캐서린 스위처의 목소리로 마라톤을 생중계한다. 마포대교의 실시간 모습이다. 일본의 마라토너 다케유키 니카야마가 선두로 달리는 모습으로 서울의 아시안게임을 극적으로 보여줬다. 곧이어 요란한 꽹과리 소리와 함께 위성쇼의 평화로운 진행을 기원하는 무속인 최희아의 굿이 시작됐다. 앞서 1963년 독일 부퍼탈에서 첫 개인전을 열면서 고사 지낼 때 쓸 법한, 그것도 피가 뚝뚝 흐르는 소머리를 갤러리 입구에 내다 걸었던 백남준답다. 우리 문화에 대한 자신감은 국악인 김영임의 ‘노들강변’, 황병기의 가야금 연주로 이어지고 정경화와 정명훈의 공연으로 절정에 오른다. 무엇이든 살 수 있는 동대문시장에서 살아 펄떡이는 미꾸라지부터 지압효과가 있다는 슬리퍼, 병에 담긴 인삼 뿌리, 거북이 등과 함께 큰 소리로 손님을 불러 모으는 호객꾼도 보여준다. 일상도 작품 속에서 만나니 한판 퍼포먼스 같다.


일본의 피아니스트 류이치 사카모토가 뉴욕의 진행자와 건배를 들고 패션 디자이너 이세이 미야케, 건축가 아라타 이소자키가 출연했다. 프랑스 조각가 아르망, 첼리스트 샬롯 무어먼도 빠지지 않았다. 백남준은 자신의 최근 발명품이라며 공 안에 작은 비디오카메라를 넣은 ‘비디오 공’도 소개했다. 인상적인 것은 영상 중간중간에 6·25전쟁과 폭격장면, 가난한 피난 시절을 삽입하고 이와 함께 눈부신 경제성장을 이룬 한국을 동시에 보여줬다는 점이다. 합쳐봐야 몇십 초도 안 될 짧은 영상이었지만 근대기 한국과 역사성이 담겼다.

총 50만달러인 이 작품의 제작비는 한국과 일본이 각각 18만달러씩, 미국이 14만달러를 부담했다. 고생하고도 방송 후 작가는 비난과 찬사를 동시에 들어야 했다. 국내 여론은 전체 영상에서 한국 비중이 30%도 안 된다며 한국 문화를 제대로 전달하지 못했다고 비판했다. 마라톤 금메달리스트인 나카야마가 선두에서, 홀로 클로즈업된 장면이 많았던 탓도 있었다. 반면 뉴욕타임스는 ‘한국의 로비용 프로그램’이라고 비꼬았다. 작품 자체로서는 비디오예술의 분방함을 자연스럽게 보여줬고 시공간의 ‘초월성’을 부각했다고 호평받았다.

백남준이 1988년9월11일 세계 11개국에 생중계 한 위성예술 3부작의 완결판 ‘세계와 손잡고’ 중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에 설치된 ‘다다익선’ 앞 사물놀이 공연 장면.

백남준이 1988년9월11일 세계 11개국에 생중계 한 ‘세계와 손잡고’의 한 장면으로 뉴욕 시대 WNET방송국 위쪽으로 UFO가 등장하고 있다.

백남준이 1988년9월11일 세계 11개국에 생중계 한 ‘세계와 손잡고’ 중 가수 데이빗 보위와 라라라휴먼스텝스의 공연 장면.

그로부터 2년 뒤 1988년 서울 올림픽을 기념하며 ‘세계와 손잡고(Wrap Around the World)’가 위성예술 3부작의 완결편 성격으로 다시 전파를 탔다. 뉴욕 WNET과 한국의 KBS가 공동으로 기획해 한국시각으로 1988년 9월11일 자정을 넘긴 0시30분부터 오전2시까지 독일·오스트리아·브라질·이탈리아·아일랜드·이스라엘·중국·소련까지 총 11개국에 방송됐다.

뉴욕의 방송국 건물 위로 UFO가 등장하고 스튜디오에는 자칭 “크라일론 행성에서 왔다”는 우주인 차림의 모비우스 박사(톰 데이비스)가 출연한다. 그는 인류를 향해 “당신들의 과격한 민족주의, 끝없는 잔인함, 당신들의 행성이 필요로 하는 것을 고의적으로 무시하는 행태가 우리 크라일론 행성의 젊은이들에게 안 좋은 예를 보여주고 있다. 그래서 안타깝게도 우리의 살인 광선을 사용해 당신 종족을 파괴하는 것이 방문 목적이다”라고 말한다. 이에 사회자는 “우리 프로그램을 본다면 인류가 형제애와 평화의 정신을 갖고 인위적인 장벽을 초월하며 소통할 수 있다는 증거를 충분히 찾을 수 있을 것”이라며 작품의 시작을 알린다. 어설프고 다소 유치한 설정이지만 작가는 이를 통해 ‘하나로 된 세계’를 거듭 강조했다.

당대 최고의 팝스타인 데이비드 보위가 무용가그룹 ‘라라라 휴먼 스텝스’와 함께 공연하고 화면은 올림픽 개막을 일주일도 채 남기지 않은 서울의 올림픽 선수촌을 연결해 각국 선수단이 자신들의 언어로 인사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에 설치된 ‘다다익선’을 배경에 두고 사물놀이가 펼쳐지고, 뉴욕의 백남준은 텔레비전에 대한 ‘제사 퍼포먼스’를 시작한다.

흰 두루마기에 갓을 쓴 백남준은 내부 부품을 꺼내고 껍데기만 남긴 텔레비전 안에 초를 밝힌다. 그 앞에 마련된 하얀 탁자에 갓을 벗어 올린 백남준은 그 위에 뽀얀 면도크림을 잔뜩 뿌리고 빨간 케첩을 듬뿍 짠 다음 쌀을 흩뿌리고서는 그대로 자신의 얼굴을 처박고 비벼댄다. 이미 1960년대부터 선보여 온 ‘백남준다운’ 퍼포먼스를 보며 런던 방송국의 PD가 “이 분(백남준)은 외계인보다 더 외계인처럼 보입니다”라고 외친다.

이 작품 또한 ‘별들의 전쟁’이었다. ‘마지막 황제’로 아카데미 음악상을 거머쥔 일본의 사카모토 류이치가 도쿄에서 공연하고 뉴욕에서는 안무가 머스 커닝햄이 춤을 추며 독일 본에서는 록 그룹 ‘죽은 바지들(Die Toten Hosen)’이 노래 불렀다. 아일랜드 더블린의 자동차 경주, 중국 베이징의 금룡(金龍)춤, 브라질의 리우의 카니발을 볼 수 있었다. 앞선 두 편과 달리 ‘세계와 손잡고’는 각 국가에서 각자 제작한 영상을 함께 선보이는 방식으로 ‘함께 즐기는 쇼’에 좀 더 초점이 맞춰졌다. 특히 독일 함부르크에서는 브람스의 옛집 앞에서 브람스콘서트를 하면서 베토벤 상가 앞에서 펑크밴드 공연을 하는 방식으로 거장에 대한 오마주도 잊지 않았다.

1986년과 88년의 위성쇼는 여러모로 의미가 크다. 위성을 도구 삼아 지구 전체에 그림을 그리듯 예술적 도구를 혁신했다는 게 하나요, 아시안게임과 올림픽 개최로 들뜬 대한민국을 문화적으로도 세상의 중심에 놓았다는 점이다. 백남준이 없었더라면 꿈도 못 꿨을 성공적인 문화올림픽이었다. 백남준은 자신의 글 ‘예술과 위성’에 이같이 적었다.

“사람들은 내게 왜 인공위성 프로젝트를 하느냐고 질문한다. 나는 그들에게 생중계 위성방송은 나의 무모함에 와 닿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모험을 찾는 것은 인간의 본성이고 생방송은 언제 무엇이 일어날지 모르는 현실감을 제공해 주기 때문이다. 인공위성 생중계는 리와인드(Rewind·되감기)가 안된다. 우리네 인생처럼.”
/조상인기자 ccsi@sedaily.com 사진제공=백남준아트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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