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주년 동원 김재철 퇴진]재계의 신사, 그는 누구인가

원칙주의 '바른말 사나이' 정평
세계에서 참치 가장 잘 잡는 선장 출신

50년 경영을 뒤로 하고 물러난 김재철 동원그룹 회장은 올곧은 ‘정도경영’에 대한 시사점을 안겨준다. 국내 원양산업의 발전을 위한 ‘도전정신’과 자녀도 말단부터 경험시키는 ‘원칙주의’도 재계가 본받을 점으로 꼽힌다.

◇세계에서 참치를 가장 잘 잡는 선장이 되기까지=바다와의 인연은 고등학교 담임선생님의 조언으로 맺어졌다. 전라도 강진의 한 농업고등학교를 졸업한 김 회장은 사실 서울대학교 농과대학 입학을 앞두고 있었다. 하지만 ‘대한민국의 미래는 바다에 있다’는 담임 선생님의 말씀을 듣고 부산 국립수산대학교(현 부경대) 어로과에 들어갔다. 그는 대학 시절 수산학을 공부하며 국내 수산업계의 낙후된 현실에 눈을 떴다. 연안 바다에서 얻을 수 있는 어족자원에 한계가 있다는 것을 느끼고 원양으로 나아가겠다는 꿈도 키웠다.

1958년, 그는 국내 최초 원양어선인 ‘지남호’가 남태평양 사모아로 출항한다는 공고를 보고 선장을 찾아갔다. 먼 바다로 향하는 배에 직접 몸을 싣고 싶었던 그는 “보수는 바라지 않고 항해 중에 사고를 당해도 원망하지 않겠다”는 서약을 하고 실습항해사로 승선했다. 침대도 없는 열악한 환경에서 무급으로 일한 그는 약 3년 만인 26세에 선장이 됐다.


‘캡틴 제이 씨 킴(Captain J. C. Kim)’. 그는 전 세계에서 참치를 가장 잘 잡는 선장으로 통했다. 바다에서 활약하던 김 회장은 일본 상사인 도쇼쿠로부터 지불보증 없이 5백t급 연승어선 ‘제31동원호’와 ‘제33동원호’를 현물차관으로 도입했다. 36세이던 1969년, 어획으로 갚는다는 조건으로 동원산업을 세웠다.

◇정도경영을 추구한 기업인=그는 ‘재계의 신사’로 불린다. 창업 후 편법과는 거리가 먼 경영 행보를 걸어왔다. 창업 당시 직접 만든 사시인 ‘성실한 기업활동으로 사회정의의 실현’을 그대로 실천해왔다. 김 회장은 기업의 책무는 ‘고용창출’과 ‘납세’라고 여겼다. 기업인이라면 흑자경영을 통해 국가에 세금을 내고 고용창출로 국민들에게 일자리를 제공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창립 이후 처음으로 적자를 냈던 1996년 그는 죄인이라는 심정으로 공식 석상에 일절 나타나지 않고 경영에 몰두했다. 동원그룹은 1998년 외환위기를 비롯해 공채제도를 도입한 1984년 이후 한 해도 빠짐없이 채용을 실시하고 있다.

자진 신고로 증여세를 납부한 일화도 유명하다. 김 회장은 1991년 장남 김남구 한국투자금융지주 부회장에게 주식을 증여하면서 62억 3,800만 원의 증여세를 자진 납부했다. 국세청이 세무조사로 추징하지 않고 증여세를 스스로 납부한 사례는 처음이었다.

◇자녀교육도 엄격히 =그는 굽이치는 파도처럼 거친 환경이 ‘성장’을 불러온다고 굳게 믿었다. 새해가 시작할 때마다 다이어리 맨 앞 장에 ‘인생의 짐은 무거울수록 좋다. 그것에 의해 인생은 성장하니까’라는 고언을 써놨다. 일본 전국시대를 통일한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이 말은 50주년 기념사에서도 인용됐다. 그는 이와 같은 강직한 철학을 바탕으로 자녀 교육에 임했다. 현장 경험 없이 자녀를 임원직에 앉히는 재계의 관행과 달리 자식들을 모두 ‘고생길’에 내보냈다. 실제로 장남인 김남구 한국투자금융지주 부회장은 대학교를 졸업하고 북태평양 명태잡이 어선에서 약 6개월간 생활했다. 차남인 김남정 부회장은 입사 후 창원의 참치캔 제조공장에서 생산직 사원으로, 청량리지역의 영업사원으로 활동했다. 동원그룹 관계자는 “부풀린 이야기가 아니라 실제로 두 자녀가 현장에서 고생을 하면서 다른 임직원들과 똑같이 업무를 배워 주변 사람들에게 귀감이 됐다”면서 “최근 몇몇 재벌 자녀들이 사회적 물의를 일으키는 가운데 그의 엄격한 자녀교육은 재계의 모범적인 사례로 평가받을만하다”고 말했다.
/허세민기자 semin@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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