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도쿄 신주쿠의 한 대형마트에 방재용품 코너가 마련돼 있다./송주희기자
초밥, 라면, 만화, 후지산‥ 이쯤 되면 떠오르는 단어는 하나. ‘일본’이다. 일본을 말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또 하나 있으니 바로 ‘재난’이다. 지리적 특성상 화산 폭발과 지진 같은 자연재해가 빈발하다 보니 열도는 늘 비상 대기 상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지난 2011년 동일본 지진 사태로 이 같은 경각심은 한층 고조됐다.
(왼쪽 위부터 시계방향으로) 장기 보관이 가능한 빵 통조림과 쿠키, 리조토, 우동 비축 식품/사진=송주희기자
이런 환경에서 자연스레 발달한 것이 바로 방재품(防災品) 산업이다. 만일의 사태에 대비한 비상식량부터 각종 의약품과 온열 장비, 간이침대·정수기·화장실 키트에 이르기까지 종류도 다양하다. 방재품 비축이 의무인 주요 기관과 기업 외에도 일반 가정에서 쓸 수 있는 품목들을 대형 마트와 백화점, 인터넷 쇼핑몰에서 살 수 있다.
그중에서도 비축 식품은 최근 ‘비상’이라는 수식어를 떼고 ‘평시에도 먹을 수 있는 식품’으로 진화하고 있다. ‘맛없다’는 인식에서 벗어나 ‘평소에도 먹고 싶은 음식’으로 소비자에 다가선 것이다. 실제로 대형 마트의 비상식량 코너에서는 밥과 라면, 리조토, 스튜, 죽, 카레 같은 식사류는 물론 쿠키, 빵, 건빵, 양갱, 초코바 간식에 이르기까지 일반 식품코너와 비교해 뒤지지 않는 다양한 종류의 상품을 만나볼 수 있다. 최근에는 평균 3~5년인 유통기한을 훨씬 넘겨 25년 보존할 수 있는 죽이 나오는가 하면 ‘마시는 밥(음료)’도 출시됐다. 비상식 제조 업체들은 장기 보존 및 가공 기술을 발전시켜 식재료의 한계도 조금씩 극복하고 있다.
25년 장기 보존 가능한 죽 식품을 만든 비축식 제조 업체의 홈페이지 화면. ‘25년 보존 가능한 맛있는 비축식’이라는 소개 문구와 함께 자사 제품을 일상에서도 즐길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세이엔터프라이즈 홈페이지
비축식의 이 같은 진화는 일본의 고민거리로 떠오른 ‘식품 로스(食品ロス)’, 즉 음식물 대량 손실(폐기)과도 맞물려 있다. 마이니치신문에 따르면 지난 2017년 기준 과거 5년간 일본 내 17개 지자체에서 폐기한 비축 식량은 176만 끼로 폐기에 든 비용만 3억 엔에 달했다. 이렇다 보니 일본에서는 평균 3~5년짜리 비축 식량의 유통기한 마감이 임박할 즈음 관공서나 대학, 기업 등이 공짜로 이를 주민이나 학생, 사원들에게 나눠주곤 한다. 도쿄도(東京都)도 지난 2017년 이듬해 1월 말로 유통기한이 끝나는 건빵 13만 인분을 무료로 배포한 바 있다. 대량 폐기를 막기 위해 국가 차원에서도 ‘롤링 스톡(Rolling stock)’을 권장하고 있다. 롤링 스톡은 비축식을 일상생활에서 소비하면서 먹은 만큼 다시 재고를 유지하는 방법이다. 그러나 ‘맛없다’라는 평가와 ‘비상식’이라는 선입견 탓에 이들이 일상의 식탁에 오르는 일은 많지 않았다.
방재용품 판매 코너에 비축식품의 ‘롤링스톡’을 권장하는 안내문이 붙어있다. 비축식을 일상에서 소비하고 소비한만큼을 다시 구입해 비축 정량을 유지하라는 내용이다./송주희기자
어느 나라에서든 재난·재해는 마주하고 싶지 않은 대상이다. 자연재해에 수시로 노출되는 일본이기에 비상식량은 ‘터지면 안 될 상황에 필요한 것’, ‘그래서 먹고 싶지 않은 음식’이라는 인식이 강할 수밖에 없다. 그런 면에서 ‘폐기되는 비축식이 많다는 것’이 어느 한 편으론 ‘심각한 사태가 발생하지 않았다’는 의미일 수 있다. 그러나 매해 수십만 끼의 식량이 개봉도 되지 않은 채 버려지는 것을 마냥 내버려둘 수도 없는 일이다. 관련 업체들이 ‘비상’이라는 이미지를 떼고 ‘일상에서도 먹을 수 있는 장기 보관 식품’으로 개발을 집중하는 이유다.
2020~2021년은 일본의 대대적인 비축식량 교체기가 될 것으로 보인다. 평균 교체 기간이 5~6년임을 고려할 때 비축 계획 확대와 수요 증가가 맞물렸던 2016년분의 교체가 집중되기 때문이다. 폐기율의 급격한 감소는 어렵겠지만, 음식물 대량 손실 경감을 위한 관련 업계의 고민과 노력이 의미 있는 결과로 이어지길 기대해본다.
/도쿄=송주희기자 ssong@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