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인터뷰] 박정학, “인생에서 막혀 있는 부분이 조금씩 열렸다”

‘파도치는 땅’은 철옹성 같은 마음의 문이 열릴 수 있는 영화

‘파도치는 땅’은 국가폭력이 개인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영화다. 지난 4일 개봉한 임태규 감독의 ‘파도치는 땅’은 간첩으로 누명을 썼다가 무죄 선고를 받은 1967년 납북 어부 간첩 조작 사건에 연루된 가족 삼대의 고통이 대물림 되는 연대기를 담고 있다.

영화 기획의 출발점은 사진 한 장 때문이었다. 납북간첩 어부 사건으로 피해를 받았다가 재심으로 무죄 판결을 받은 할아버지가 클로즈업되면서 울먹이는 사진이었다. 영화는 간첩 어부 조작 사건이라는 실화를 바탕으로 어쩔 수 없이 멀어진 아버지와 아들의 이야기를 담담하게 그려냈다.

연출 계기에 대해 임태규 감독은 “이 영화의 시작은 한 장의 사진에서 시작됐다. 납북 간첩 어부 사건에서 무죄 판결을 받은 할아버지에게 앞으로 무얼 하고 싶냐는 질문에 그는 자기 아들이 보고 싶다고 답했다. 과연 그 아들은 어떻게 살고 있으며, 이 둘의 관계는 어땠는지 그려보고 싶었다.”고 밝혔다.
배우 박정학/사진=양문숙 기자

배우 박정학/사진=양문숙 기자

임태규 감독은 ‘폭력의 씨앗’ 이후 차기작 ‘파도치는 땅’을 통해 국가의 폭력으로 인한 가족 담론을 이끌어냈다. 간첩 조작 사건의 희생자인 아버지와 아들을 멀어지게 한 국가 폭력에 대한 거대 담론 보다는 “왜 아버지와 친해질 수 없는가”란 보다 넓은 질문을 품고 있다.

생활고를 겪는 50대 가장 문성이 간첩 혐의로 옥살이를 한 아버지의 투병 소식을 듣고 고향 군산으로 내려간다. 회생 불능의 위독한 상태의 아 버지 ‘광덕’을 만나기 위해 군산으로 내려간 ‘문성’과 문성의 아들 ‘도진’은 국가 권력의 폭력이 초래한 갈등의 골을 담담히 메워간다.

이야기를 끌고 가는 주인공 ‘문성’은 1987년 연극배우로 연기인생을 시작한 이후 영화 ‘무사’(2001)와 ‘김 복남 살인사건의 전말’(2010)을 통해 연기를 인정받은 ‘박정학’ 배우가 맡았다. 박정학은 MBC 일일드라마 ‘용왕님 보우하사’ 및 MBC 수목드라마 ‘더 뱅커’에 이어 영화 ‘파도치는 땅’에서 열연을 펼치며 장르를 넘나드는 열일행보를 이어가고 있다. 간첩 어부 조작 사건이라는 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영화 ‘파도치는 땅’에서 박정학은 간첩으로 몰렸던 아버지와 절연하고 지내다, 아버지가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고 30여 년 만에 고향으로 내려가 잊고 지낸 상처와 마주하게 되는 인물이을 맡았다.

박정학은 대한민국의 평범한 50대 남성이면서, 과거의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인물 ‘문성’ 역을 맡아 쉽지 않은 내면 연기를 선보이며 다시 한번 연기 변신에 성공했다. 무엇보다 선 굵은 연기를 주로 선 보여온 박정학의 보다 일상적인 연기를 만날 수 있는 작품이다. 배우의 강인한 정면 컷 보다는 사연이 담긴 감춰진 옆모습, 쓸쓸한 뒷모습이 차례로 박히는 영화이기도 하다.

영화 ‘파도치는 땅’은 간첩 조작 사건의 희생자인 아버지로 인해 고통 받는 삼대의 이야기 를 담고 있다/사진=아이 엠(eye m)


전주 국제영화제 JCP로 첫 공개된 <파도치는 땅>은 임태규 감독의 묵직한 문제의식과 일관성 있 는 주제 의식, 섬세한 영화 스타일로 높은 점수를 받았다.

“선배님과 새로운 작업을 하고 싶다”는 내용이 담긴 임태규 감독의 손편지를 받고 이 작품을 선택한 박정학은 “편지에서 진정성을 느꼈다. 이런 분이라면 꼭 함께 해보고 싶었다.”고 출연 계기를 털어놨다.

“감독이 장문의 편지와 시나리오를 주셨다. ‘저는 새로 시작하는 신인 감독이지만, 선배님 모시고 충분히 함께 즐기는 영화를 찍어보고 싶습니다.’라며 겸손하게 글을 보냈더라. ‘이런 친구면 믿음이 간다’는 느낌이 들더라. 한번 만나 볼 필요가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실제로 상업영화와는 또 다른 경험을 할 수 있었다. 감독의 전작인 ‘폭력의 씨앗’ 은 이 작품을 출연하기로 결정한 뒤 iptv에서 우연히 봤다. 감독의 전작이 진정성 있는 편지 하나로 궁금하지 않았다. ”

‘파도치는 땅’은 박정학이 처음으로 도전한 독립영화이다. 시나리오도 없고 카메라 역시 무빙이 거의 없이 촬영됐다. 게다가 감독은 배우에게 ‘연기하지 말라’는 특별 주문(?)까지 했다.


박정학은 “처음엔 적응하기 어려웠다”고 솔직한 대답을 이어갔다. 배우 33년차인 그에게도 새롭고 낯선 촬영이라 처음에는 무척 당혹스러웠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배역에 푹 빠져들었단다.

“처음엔 시나리오가 있었는데 곧 쓰레기통에 갔다버렸다. 아예 정해진 대본 없이 촬영을 하기로 했다. 촬영 두 시간 전에 미리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고, 현장에서 대사를 만들어서 찍었다. 처음 해본 경험이었지만 더 와 닿고 좋았다. 자연스럽게 감정을 이야기할 수 있었다. 토론을 많이 했던 시간이었다. 그 뒤 즉흥 연기의 형식으로 찍었다. 처음엔 연기자한테 왜 연기를 하지 말라고 하는지가 의문이었다. 시간이 조금 지나니 그 의미를 알겠더라. 재미있게 찍은 경험이었다. 매 상황을 즐기면서 촬영했다. ”

카메라 무빙이 거의 없는 영화다. 두세 번 정도 무빙이 있을 뿐, 고정된 카메라 그 안에서 배우들이 들락날락하면서 연기를 하는 포맷으로 촬영됐다. 그는 “나온 결과는 모르겠고 신선한 경험인 건 분명했다”고 자평했다.

“처음에 그런 부분들이 많이 어색했다. 하면서 그런 것들이 익숙해지면서 매 장면들이 너무 좋았다. 할리우드에서 씬 바이 씬을 찍을 땐 그런 식으로 찍는다는 것을 들었는데 직접 경험하는 건 달랐다. 이런 것도 나쁘지 않구나 생각했다. 그 중에서 가장 인상적인 것은 화장터에서 아버지 관이 천천히 들어가는 장면이 있는데, 현장에서 직접 보면서 여러 가지 생각들이 스치고 지나갔다. ”

배우 박정학/사진=양문숙 기자

‘파도치는 땅’은 제19회 전주시네마프로젝트에 선정, 아르헨티나에서 열린 제33회 마르델 플라타 국제영화제 파노라마 부문에 초청 받아 임태규 감독의 연출력을 다시 한번 입증했다. 박정학은 “처음 볼 땐 약간 다큐처럼 다가와 무겁다는 느낌도 있지만 점점 ’괜찮다‘는 느낌이 들었다고 했다. 해외 관객들에게도 어필 할 수 있는 ’아버지와 아들의 이야기‘ ’국가폭력‘이란 보편적 정서를 건드린 점 역시 주효했다.

“세계 어느 나라건 국가폭력으로 상처 입은 자들이 다 있는 것 같다. 그 내용은 크게 다르지 않더라. 대한민국, 또 다른 나라도 마찬가지다. 아르헨티나도 민주화 과정이나 정치적 상황을 겪은 것이 다 비슷했다. 한국적이면서 보편적이라서 이해가 된다고 말하더라.”

영화의 제목은 대한민국이라는 땅 아래 가려져 파도 치듯 일렁이는 ‘아픔’에 관한 이야기를 의미한다. 이 영화의 강점이자 시작은 심도 깊은 주제와 국가 폭력으로 인한 희생자 가족의 오래된 풍경 안에서 ‘관계의 회복을 이룬다 ’는 희망적 메시지를 품고 있는 점. 감독은 삼대 부자 사이의 벌어진 틈을 봉합하는 과정을 그리는데 큰 중점을 두었으며, 이 영화의 핵심 주제가 되었다. 아버지와 관계가 좋지 않던 문성은 아들 도진(맹세창)이 사랑하는 윤아(양조아)의 딸을 보며 조심스럽게 희망의 가능성을 비춘다.

박정학은 한마디로 “‘파도치는 땅’은 무겁지만 철옹성 같은 마음의 문이 열릴 수 있는 그런 영화이다”고 소개했다. 그렇기에 “제목과 달리 너무 평온하게, 또 가랑비에 옷 젖듯이 젖어들 수 있을 것이다”고 자신했다.

“ ‘파도치는 땅’은 아버지와 아들, 중간의 우리 시대의 아버지에 관한 영화이다. 철옹성처럼 닫힌 마음의 문이 조금씩 열리고 받아들이게 되는 영화이다. 상처를 덮어놓는다고 치유되지 않는다. 문성이 오래도록 잊고 지냈던 상처를 떠올리며, 마음속 깊은 곳에서 일렁이는 낯선 감정과 마주하게 되듯, 가족 간의 갈등이 이 영화를 통해 많이 풀리면 좋겠다. 저희 영화는 2번 봐야 가슴이 따뜻해질 수 있다. 국가폭력에 상처입은 사람들이 너무 힘들고 외롭지만, 인생에서 막혀있던 부분이 조금씩 열렸으면 한다. 부모 자식간에 닫혀있던 마음의 문이 열린다면 , 우리가 사는 사회도 좀 더 따뜻해질 수 있지 않을까란 그런 생각을 해본다.

/정다훈기자 sestar@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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