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크 폼페이오 미국 국무장관이 22일(현지시간) 기자회견을 열고 한국을 포함한 8개국에 적용해왔던 이란산 원유수입 금지 예외조치를 연장하지 않기로 했다고 발표하고 있다. /워싱턴DC=AFP연합뉴스
도널드 트럼프 미 행정부는 지난해 11월 이란에 대한 경제·금융제재를 전면 복원하면서 우리나라와 중국·인도 등 8개국에 대해 한시적으로 원유수입을 허용했다. 예외기간은 180일로 만료시점이 다음달 2일이다. 최근에는 리비아 정정불안으로 국제유가가 들썩이면서 미국이 우리나라를 포함한 5개국의 이란산 원유수입 허용기간을 연장해줄 것이라는 전망이 흘러나오기도 했다.
이런 예상과 달리 미국 정부가 22일(현지시간) 전격적으로 이란산 원유수입 허용을 금지하기로 한 데는 대이란 제재의 틀을 더 굳건하게 하겠다는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의중이 담긴 것으로 보인다. 블룸버그는 “예외조치 중단은 국제유가 상승 우려로 이 문제에 신중했던 국무부를 상대로 한 강경파 존 볼턴 국가안보회의(NSC) 보좌관의 승리”라고 평가했다. 앞서 미국 정부는 이란혁명수비대를 외국 테러조직(FTO)으로 지정한 바 있다.
미국 정부의 이 같은 방침이 나오자 당장 국제 원유가격이 들썩이기 시작했다. 당장 국제원유시장에서 서부텍사스산원유(WTI)와 북해산 브렌트유는 각각 2% 이상 올라 지난해 11월 이래 최고치로 치솟았다. 지난해 하반기 곤두박질치던 국제유가는 석유수출국기구(OPEC)와 러시아가 채산성 제고를 위해 올 초부터 감산에 들어감에 따라 상승세를 지속해왔다. 베네수엘라 원유에 대한 미국의 제재와 나이지리아의 송유관 폭발사고도 유가 상승을 부추기는 요인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이란산 원유의 수출길을 막는 것은 상황을 더 악화시킬 수 있다는 게 전문가들의 진단이다. 당장 이란 군부는 이날 미국이 이란산 원유수출에 대한 제한적 제재유예를 연장하지 않은 것과 관련해 원유 수송로인 호르무즈해협을 봉쇄하겠다고 경고하며 맞대응했다. 이란이 실제로 이 해협을 막으면 원유가격이 배럴당 200달러까지 오를 것이라는 게 대체적인 전망이다. 미국의 방침에 따라 이란산 원유수입을 중단하게 되면 다른 지역으로 도입선을 다변화해야 하고 그에 따라 가격이 상승할 가능성도 높다. 블룸버그에 따르면 3월 기준 이란산 원유를 가장 많이 수입한 나라는 중국으로 하루 61만3,000배럴이며 우리나라는 38만7,000배럴이다.
다만 미국 정부가 유가 상승을 저지하기 위해 이란산 원유감소분을 사우디아라비아와 아랍에미리트연합(UAE)을 통해 상쇄할 방침이어서 국제유가에 미치는 영향이 예상보다 크지 않을 수 있다는 관측도 나온다. 백악관은 이날 성명에서 “사우디와 UAE는 글로벌 원유시장 공급이 적절히 유지되도록 약속했다”면서 “모든 이란산 원유가 시장에서 퇴출당하더라도 글로벌 원유수요가 충족될 수 있도록 시의적절한 조치를 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하지만 수입 의존도가 높은 우리나라의 경우 어떤 식으로든 타격이 불가피하다는 분석이 나온다. 한국석유공사의 집계에 따르면 2월 기준 국내 원유도입 물량에서 이란이 차지하는 비중은 8.6%다. 사우디아라비아와 쿠웨이트·미국·이라크에 이어 다섯 번째로 많다. 블룸버그는 “원유가격이 상승하면 원유에 대한 수입 의존도가 높은 국가들에서 재정적자가 커지고 물가가 오를 수 있다”고 설명했다. 이란산 원유수입 규모를 볼 때 가장 곤혹스러운 곳은 중국과 우리나라일 것으로 추정된다.
이란산 원유수입이 중단되면 국내 석유화학 업계에도 빨간불이 켜진다. 현재 한화토탈과 SK인천석유화학·현대케미칼이 이란산 원유를 사용하고 있다. 이들 업체는 콘덴세이트 정제에 최적화된 시설을 통해 기초원료인 나프타를 추출하고 있어 다른 유종은 쓰기 어렵다. 이 때문에 이란산 수입이 막힐 경우 카타르나 러시아·호주 등지에서 콘덴세이트를 구해야 한다.
문제는 물량을 확보하더라도 수익성 악화가 불가피하다는 점이다. 업계 관계자들에 따르면 이란산 원유는 나프타 함량이 80%에 달하고 카타르 같은 다른 국가에서 나오는 콘덴세이트보다 배럴당 최소 2~3달러 이상 저렴하다. 국내 석유화학 업계의 한 관계자는 “이란산 원유 때문에 콘덴세이트 가격이 비교적 낮게 유지됐는데 앞으로는 가격이 치솟을 수밖에 없다”며 “국내 업체들이 호주 등지에서 대체물량을 확보했다지만 콘덴세이트 가격이 오르면 제품 값을 높이든지 이윤을 줄여야 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김영필·양철민기자 susopa@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