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형, 지금 이 순간 과거에 만났던 모든 사람들을 기꺼이 사랑하고 포옹할 수 있을 것 같아. 오늘 죽음과 직면하고 소중한 사람들에게 작별을 고할 때가 되어서야 그런 사실을 깨달았어. 돌이켜보니 비방과 실수와 나태 속에서 소중한 것을 얼마나 많이 잃어버렸는지 몰라. 내 심장과 영혼에 얼마나 많은 죄를 지었는지 몰라. …형! 형 앞에서 맹세할게, 나는 희망을 잃지 않을 거야. 내 영혼과 심장을 순결하게 간직할 거야. 나는 더 나은 사람으로 다시 태어날 거야. 이것이 내 희망이자 위안의 전부야!’ (석영중, ‘매핑 도스토옙스키’, 2019년 열린책들 펴냄)
도스토옙스키는 한 번 죽었다가 살아났다. 내란음모죄로 체포된 당대의 지식인들에게 황제는 사형을 선고했다. 하지만 그냥 죽이자니 심심했다. ‘하룻강아지들에게 그 가련한 목숨이 황제의 혀끝에 달렸다는 것을 보여주마.’ 처형식 당일 총알이 발사되려는 찰나 두 눈을 질끈 감은 도스토옙스키와 죄수들에게 농담 같은 얘기가 전해진다. ‘자비로운 황제께서 목숨만은 살려주신단다.’
고려대 노문학과 석영중 교수가 러시아의 대문호 도스토옙스키의 생과 시공간을 촘촘히 복원한 책의 한 장면이다. 이 ‘가짜 처형식’ 직후 도스토옙스키는 완전히 다시 태어났다. 공포와 원망에 짓눌린 과거는 죽고 생의 간절함과 열망으로 불타는 도스토옙스키가 부활한 것이다.
도스토옙스키만 이런 끔찍한 장난에 시달리는 것은 아닐 터이다. 하루에도 몇 번씩 장난처럼, 농담처럼 웃으며 상처와 모멸의 칼을 꽂는 이들로 인해 우리의 영혼은 수시로 죽는다. 그러나 비록 내가 도스토옙스키 같은 거장은 아닐지라도 그처럼 고결하게 대응하며 하루를 견뎌낼 수는 있지 않을까. 비방과 나태의 늪에 빠지지 않고 더 나은 사람이 됨으로써 내 주변의 치졸한 악당들에게 복수할 수 있지 않을까.
부디 희망을 잃지 말 것, 내 영혼과 심장에 죄짓지 말 것. 죽음을 뚫고 나온 도스토옙스키의 목소리다. <이연실 문학동네 편집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