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면세점 시장은 지난 2015년 9조2,000억원에서 지난해 18조9,600억원으로 급성장했다. 올해는 20조원을 훌쩍 뛰어 넘을 것으로 전망된다. 중국 관광객들이 서울 시내의 한 면세점에서 제품을 구입하고 있다. /서울경제DB
지난 2014년 6개에 불과했던 서울 시내면세점은 2019년 13개로 늘었다. 박근혜 정부 때인 2015년과 2016년 추가로 허가를 내주면서 신세계·현대백화점·한화·두산 등 신규 사업자가 시장에 진입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롯데·신라 등 사실상 빅2의 과점체제였던 시장은 이제 롯데·신라·신세계 등 빅3 중심의 완전경쟁체제로 바뀌었다.
유통기업들의 시내면세점 대전(大戰)은 면세점 시장을 양적·질적으로 키웠지만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부작용도 컸다. 2016년에는 면세점 신규 특허심사가 최순실 국정농단 사건과 맞물려 로비사건으로 비화됐다. 관련 부처인 관세청과 기획재정부가 압수수색을 당했고 롯데그룹은 총수가 법정 구속되는 사상 초유의 일도 발생했다.
정부가 다음달 초 보세판매장 제도운영위원회를 열고 시내면세점 신규 특허 허용 여부를 결정한다. 문재인 정부 들어서는 처음이다. 업계에서는 시내면세점 추가 허용 여부에 대해 의견이 엇갈리고 있다. 선발주자인 롯데와 신라는 시내면세점을 추가 허용하면 출혈 경쟁이 불가피하다는 입장이다. 반면 후발주인 신세계와 현대백화점 등은 환영하는 입장이다. 면세점 시장이 과점에서 완전경쟁체제로 바뀐 가운데 신규 특허가 허용되면 시장 구도는 다시 한번 요동칠 것으로 전망된다.
◇과점에서 완전경쟁체제로…시장 규모 20조원 훌쩍 넘을 듯=국내 면세점 시장은 2015년까지 롯데의 독무대였다. 2015년 매출 기준 국내 면세점 점유율은 롯데 50.1%, 신라 29.5%로 두 곳의 점유율이 무려 79.6%에 달했다. 시장 지배적 사업자였던 롯데의 지위가 흔들린 것은 정부의 신규 특허 발급으로 신세계와 현대백화점 등이 시내면세점 시장에 진입하면서부터다. 여기다 지난해 신세계가 인천공항 면세점 2곳(T1·T2)을 가져오면서 롯데의 점유율은 40% 밑으로 떨어졌다. 신세계는 면세점 사업을 시작한 2016년 말 7.9%에서 올 1·4분기 17.9%까지 치고 올라왔다. 반면 롯데는 37.9%, 신라는 25.9%로 줄었다. 면세점 시장이 과점체제에서 ‘빅3’가 본격 경쟁하는 구조로 바뀐 것이다.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THAAD·사드) 사태 여파로 중국 관광객들이 급감했지만 다이궁(代工)으로 불리는 보따리상이 그 자리를 메우면서 국내 면세점 시장은 2015년 9조2,000억원에서 지난해 말 18조9,600억원까지 급성장했다. 매년 25%가량 성장한 셈이다. 이런 추세라면 올해는 20조원을 훌쩍 넘어설 것이 확실하다. 특별한 변수가 없다면 오는 2020년에는 30조원에 육박할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유통기업들이 관심을 보이는 것도 면세점 사업의 성장성이 상당하기 때문이다. 일부에서는 다이궁 송객 수수료 지급 등으로 인해 영업이익이 별로 늘지 않아 속 빈 강정이라는 지적을 하기도 하지만 이는 한쪽 면만 보고 하는 얘기다. 송수범 한국기업평가 수석연구원은 “시내면세점은 허가를 받으면 기본적으로 수익이 나는 사업”이라며 “브랜드와 계열사 이미지 제고 효과는 돈으로 산출하기 어려운 무형의 효과”라고 말했다.
◇추가 여부에 업계 ‘동상이몽’…제주가 새로운 승부처=정부는 관광산업 활성화와 면세점 산업 육성 등을 위해 시내면세점을 더 늘릴 필요가 있다는 입장이다. 홍남기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지난해 12월 ‘2019년 경제정책 방향’에서 “시내면세점 추가 설치로 외국인 관광객 편의를 제공해 한국 방문을 활성화하겠다”고 밝혔다. 정부는 이후 면세점 태스크포스(TF)를 만들어 특허권 연장 등의 제도를 개선했고 지난 2월에는 관세법을 개정해 진입 문턱도 확 낮췄다. 빅3 체제로 재편된 시내면세점 판도에 다시 지각변동이 올 수 있는 판이 깔린 것이다.
개정안에 따르면 신규 면세점 특허는 광역 지방자치단체별 외국인 관광객 수가 전년보다 20만명 이상 증가하거나 매출액이 2,000억원 이상 늘어나는 두 가지 요건 가운데 한 가지만 충족돼도 내줄 수 있다. 기존에는 전국 시내면세점 외국인 매출액·이용자 수 50% 이상 증가와 지자체별 외국인 관광객 증가 수 30만명 이상 두 요건을 동시에 충족해야 했다.
서울과 제주도·경기도·인천시는 개정된 요건을 충족한 것으로 알려졌다. 정부의 의지에 달렸지만 4개 지역에 4개 이상 시내면세점이 늘어날 가능성이 있다는 얘기다. 관건은 서울과 제주도다. 서울은 지금도 포화 상태라는 지적이 있어 배제될 가능성이 있다. 이럴 경우 제주에 신설되는 신규 면세점을 놓고 유통기업들의 경쟁이 치열해질 것으로 전망된다.
롯데와 신라를 맹추격하고 있는 신세계는 서울 시내 강남·강북, 부산 시내면세점을 갖고 있지만 아직 제주도에는 면세점이 없다. 만일 신세계가 서울이나 제주에 추가로 시내면세점을 확보할 경우 빅3의 경쟁은 더욱 치열해질 것으로 보인다. 2016년 5월 워커힐점 특허권 만료로 폐점한 SK네트웍스가 서울에 재도전할지도 관심이다. 박소영 한국신용평가 수석연구원은 “지난해 여름 이후 면세점 시장 경쟁구도가 많이 바뀌었다”며 “(추가 특허가 허용되면) 경쟁이 격화되며 시장 점유율 변동에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말했다.
서울 시내의 한 면세점 화장품 매장에서 고객들이 화장품을 구매하고 있다./서울경제DB
◇규모의 경제가 성패 갈라…바잉파워·명품유치가 관건=면세점 사업의 성패는 규모의 경제가 가른다. 가장 중요한 요인은 바잉파워(buying power)다. 주요 면세품을 대량으로 구매하려면 아무래도 매출 등 시장 점유율이 높은 것이 유리하다. 물류창고인 보세창고 운영 등 재고관리에도 도움이 된다. 면세점은 주로 외국인을 상대로 하기 때문에 매출은 외국인 관광객 수에 달려 있지만 시장 내 경쟁을 위해서는 상품 경쟁력과 고객을 얼마나 끌어들일 수 있느냐 하는 집객 능력, 재고관리 능력도 중요하다. 이는 면세점 시장 점유율로 구축된 바잉파워로 결정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막강한 바잉파워는 물품 공급업체들에 대한 지배력 강화로 이어지고 물품 구매대금의 결정권을 공급업체가 아닌 판매업체가 쥘 수 있는 원천이 된다. 한국 면세점 업체들이 세계 1위의 경쟁력을 보이는 것도 바잉파워에 따른 세계 1위의 점유율과 가격 경쟁력 덕분이다. 한국 면세점의 화장품 가격이 세계 어느 유통 채널보다 저렴한 것도 이 때문이다. 송 수석연구원은 “매출이 1조원 늘면 구매 원가도 1% 줄일 수 있다는 게 정설”이라며 “(업체들이 면세점을 늘리려는 것도) 결국은 바잉파워 때문”이라고 말했다.
매출에 큰 영향을 미치는 명품업체를 유치하고 가격 할인을 많이 받기 위해서도 바잉파워를 키워야 한다. 물론 면세점 위치도 중요하다. 신규 면세점들이 이른바 유럽 3대 명품으로 통하는 루이비통·샤넬·에르메스 유치에 고전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박 연구원은 “명품 유치는 사업 경쟁력과 브랜드 인지도 제고 측면에서 매우 중요하다”고 말했다. /김정곤 논설위원 mckids@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