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전한시대에 사마상여라는 문인이 있었다. 당시 대단한 재산가인 탁왕손의 딸 탁문군과 사랑하는 사이가 됐지만 부부의 연을 맺지 못했다. 탁문군은 비록 열 일곱 살에 청상과부가 됐지만 부잣집 외동딸이었고 사마상여는 나이도 많고 돈도 벌지 못하는 건달이었다. 두 사람은 어느 칠흑 같은 밤 탁왕손의 눈을 피해 줄행랑을 쳤다. 기록상 세계 최초의 연애 커플인 사마상여와 탁문군의 사랑은 이렇게 야반도주로 시작한다. 야반도주(夜半逃走)는 말 그대로 밤의 중간, 즉 한밤중에 아무도 모르게 도망치는 것이다. 지금도 청두에 가면 ‘사랑의 거리’라는 길이 있어 2,000년 전 연인의 사랑을 기린다고 한다.
옛날에는 연인이 도저히 사랑의 결실을 보지 못할 때 새 인생을 시작하려고 생면부지의 먼 곳으로 떠났다. 요즘에는 사랑의 자리를 돈이 꿰찼다. 사업을 할수록 돈을 벌기는커녕 빚만 쌓일 때 바람처럼 사라진다. ‘아마도 그건 아버지·어머니와 맞닿아 있기를 바라는 마지막 마음의 끈일 터였다. 그것이 뚝 끊겼다. 그것을 고스케 스스로 분명하게 알 수 있었다.’ 히가시노 게이고의 소설 ‘나미야잡화점의 기적’에는 돈 때문에 야반도주하는 가족의 얘기가 나온다. 사업하다 망한 아버지는 가족을 위한다며 그나마 있는 재산을 챙겨 도망치지만 아들은 혼자만 살려는 아버지를 인정할 수 없어 부자의 연을 끊는다. 고스케 아버지가 야반도주하던 1970년대는 일본 경제가 고속성장하던 시기였다. 성장의 그늘도 그만큼 컸는지 야반도주도 많았다. 그래서인지 일본에서는 이를 도와주는 이른바 ‘야반도주 전문 용달’이 일찍부터 발달했다. 이 서비스는 짐을 일반용달에 비해 훨씬 빠른 속도로 원하는 곳에 옮겨준다. 야반도주를 돕는 서비스의 특성상 트럭 엔진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는 우스갯소리가 있을 정도다.
우리나라에서는 1990년대 중국에 진출한 기업이 현지에서 도망쳐 나라 망신을 시키더니 최근에는 이런 망신살이 동남아시아로 확산되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까지 나서 사태 수습을 촉구한 한국인 야반도주 사건의 범인이 잡혔다. 인도네시아 한인 봉제업체 SKB의 김모 대표는 지난해 10월 직원 임금을 체불한 채 잠적해 3,000명이나 되는 현지 노동자에게 피해를 줬다. 저 혼자 살려고 남에게 손해를 끼치는 야반도주는 국경도 없는 모양이다. /한기석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