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16년 4월30일. 한 남자가 미국 워싱턴DC 힐튼호텔의 홀을 가득 메운 수백 명의 청중 앞 단상에서 연설을 하고 있다.
“최근에 누가 제게 이런 말을 하더군요. ‘당신은 이제 옛날 사람이에요. (캐나다 총리인) 쥐스탱 트뤼도에게 완전히 밀려났다고요. 잘생기고 매력적인 그가 곧 미래예요’라고요. 그래서 제가 그랬죠. ‘쥐스탱, 그만 좀 해’.”
폭소를 터뜨리는 청중의 박수를 받으며 천연덕스러운 표정으로 쉴 새 없이 농담을 쏟아내는 남자는 다름 아닌 버락 오바마 당시 미국 대통령이다. 퇴임을 반년 남짓 앞두고 마지막 백악관 출입기자단 연례 만찬에 참석한 그는 8년 동안 늙어버린 자신의 모습에 대한 ‘자학 개그’부터 정치현안에 대한 풍자, 다가올 대선의 여야당 주요 후보들을 겨냥한 ‘뼈 있는’ 유머까지 구사하며 장중을 웃음바다로 만들었다.
이맘때가 되면 이미 ‘옛날 사람’이 된 오바마 전 대통령이 온갖 정치 유머로 청중을 쥐락펴락하던 모습이 생각난다. 4월 마지막 토요일에 열리는 백악관 출입기자 연례 만찬은 미국 대통령이 평소의 근엄함을 내려놓고 공식 석상에서 마음껏 농담을 할 수 있는 유일무이한 자리였다. 아쉽게도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불참으로 3년째 이 볼거리가 사라졌지만 말이다.
사실 오바마 전 대통령은 연례 만찬 자리에서뿐 아니라 TV 인기 프로그램에서 콩트를 하거나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서 우스꽝스러운 모습을 선보이는 등 국민들을 웃기느라 적잖은 노력을 기울였다. 세계에서 가장 바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미국 대통령이 개그 욕심을 부린 것은 유머야말로 그가 임기를 마치는 순간까지 높은 인기를 유지한 중요한 원동력이자 정치적 무기의 하나였기 때문이다.
정치인에게 유머는 국민들과의 거리를 좁힘으로써 호감을 얻고,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정책을 어필하고, 자신을 겨냥한 공격이나 루머에 얼굴을 붉히지 않고 재치 있게 대처하는, 그리고 무엇보다 국민을 웃게 만들 수 있는 고도의 정치 기술이다. 이 때문에 선진적인 정치문화를 쌓아온 미국과 유럽 등에서는 위트와 웃음이 이상적인 정치 지도자의 덕목으로 꼽혀왔다. 지금은 정계에서 은퇴한 미국 공화당의 거물 정치인 밥 돌은 국가 지도자는 경제관리 능력과 정치적 스킬, 외교력 같은 중요한 ‘통치력(backbone)’ 못지않게 유머감각(funny bone)을 갖춰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유감스럽게도 한국 정치인들에게서는 그런 덕목을 찾아보기 힘들다. 유머를 구사하려면 먼저 자신의 강점과 약점을 객관적으로 인정하고 이를 재치 있는 웃음으로 승화시킬 수 있는 여유가 있어야 한다. ‘나는 옳고 너는 틀렸다’는 이분법 사고에 사로잡혀 스스로를 웃음거리로 만들 수 있는 여유도, 상대의 유머를 포용할 수 있는 아량도 없다면 유머감각은 기대할 수 없다.
대신 우리 정치인들은 정치를 코미디로 만드는 데는 탁월한 감각을 가진 듯하다. 선거제·사법개혁법안의 패스트트랙 지정을 놓고 벌어진 여야 4당과 자유한국당의 충돌로 국회에서는 수년 만에 서로 치고받고 막아서는 몸싸움과 감금·점거 사태가 벌어지더니 급기야 쇠망치·장도리에 이름조차 생소한 ‘빠루’라는 무시무시한 도구까지 등장했다. 죽기 살기로 싸우는 모습을 온 국민이 목격했는데도 양측은 반성은커녕 폭력 사태가 서로의 책임이라고 떠넘기기에 급급하다. 국회가 난장판이 된 와중에 경제는 침체를 향해 곤두박질치고 민생은 더 피폐해지고 있는데도 아랑곳하지 않는다. 이런 막장을 지켜보고 있자니 한심하고 분통이 터지는 것을 넘어서 이제는 실소가 나온다.
무능하고 혼탁한 정치 때문에 웃을 일이라고는 없어진 국민들은 때로는 아예 코미디언에게 나라를 맡기기도 한다. 심각한 경제난과 정치인들의 끝없는 부정부패에 절망한 우크라이나 국민들은 최근 대통령선거에서 정치라고는 해본 적도 없는 코미디언 볼로디미르 젤렌스키에게 몰표를 던졌다. 실망만을 안겨준 현실의 정치인에게 목을 매느니 연기로라도 자신들에게 웃음과 희망을 줬던 코미디언을 택한 것이다. 정치 혐오가 극으로 치닫는 한국에서도 그러지 말라는 법이 없다.
유머감각까지는 바라지 않는다. 그저 정치를 막장 코미디로 만들지는 말아줬으면 하는 것이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갖는 소박한 바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