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균형발전이라는 명분과 ‘표가 된다’는 실리에 따라 정부와 정치인·지자체가 전국 13곳을 산학융합지구로 지정했으나 실질적으로는 학생들이 떠나고 기업이 오지 않는 애물단지로 전락하고 있다. 지난 2017년 3월 열린 충남 당진 산학융합지구 준공식. /연합뉴스
산학융합지구가 기대와 다르게 애물단지로 전락한 이유는 무엇일까. 전문가들의 말을 종합하면 결국 정부의 안일한 인식, 대학의 이기주의, 선심성 공약에 눈먼 정치권의 합작품이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산학융합지구의 기본 개념은 산업단지 안에 캠퍼스와 기업연구관이 함께 있는 공간(산학융합캠퍼스)을 조성, 학교와 기업, 학생과 근로자가 참여하는 현장과 기업 수요 중심의 새로운 인력양성 및 산학협력 모델을 구축하는 것이다.
당초 기본적인 콘셉트는 국내 최대 중소기업의 집적지인 안산 시화·반월 산업단지 안에 있는 한국산업기술대였다. 이미 산단 안에 위치하고 있었기 때문에 산학협력은 일상적이었다. 이곳이 1호 산학융합지구가 됐다. 여기는 지금도 일정한 성과를 내면서 성공적으로 운영되고 있다.
◇텅 빈 신규 산단 분양률 높일 목적도=하지만 이 모델을 무리하게 타 지역에 접목하려 한 것이 문제였다. 산학융합지구에 대한 정부의 국비지원은 땅을 사고 건물을 짓는 데 2년간 60억원, 운영하는 데 3년간 60억원 등 5년간 총 120억원에 그친다. 여기에 지방자치단체와 학교의 투자가 추가된다. 그러다 보니 땅값이 비싼 기존 산업단지 대신 신규 산업단지가 대상사업지로 떠올랐다. 텅 빈 신규 산단의 분양률을 높이려 골머리를 앓던 정부나 지자체 입장에서도 여기에 대학이 들어온다는 것이 기업을 유인할 수 있는 호재였다. 지역 정치인들 역시 당연히 반겼다. 대학과 학생을 매개로 기업들이 들어온다면 이보다 ‘득표에’ 좋은 소식은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일부 정치인은 자신의 지역구에 산학융합지구를 유치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움직였다. 경기 안산, 충북 오송 등 2곳 정도를 제외하면 어디 하나 제대로 돌아가는 곳이 없는데도 전국에 13개가 생긴 데 이어 올해에만 4개 지역이 추가되는 것이 이를 증명한다.
대학도 안이했다. 상시적으로 자금난에 시달리던 대학들은 정부와 지자체 사업이라고 하자 사업비 예산을 탐내며 덥석 물었다. 그러면서도 대학들은 캠퍼스 이전에 대한 학내 반발 등을 우려해 교수진과 학생을 최소화해 보내는 방식으로 문제를 키웠다. 일부 학과 혹은 단과대만 옮겨도 산학 간 협력 시너지가 생기고 캠퍼스가 자립 가능할 것이라고 정책 당국이나 대학이 안일하게 판단한 것이다.
한 전직 산학융합원 원장은 “분양도 제대로 되지 않은 석문국가산업단지에 캠퍼스를 신설한 당진 사례에서 보듯이 전반적으로 지역별로 선정 과정에서 정치권의 입김이 작용한 곳이 적지 않다”며 “대학이 일부 이전하면 기업체가 알아서 모일 것이라는 정책 결정권자의 안일한 인식도 문제였다”고 지적했다.
◇참여기업, 대부분 소기업. 산학협력 수요 없어=산학융합지구 설립 이후에는 연구개발(R&D) 협력 수요가 있고 학생들이 선호할 만한 양질의 기업이 부족한 것이 침체의 가장 큰 이유로 꼽힌다. 산학융합 캠퍼스 안에 번듯한 기업들만 들어와 있다면 학부생과 대학원생들이 교통 등 각종 불편함에도 불구하고 인턴십과 공동 R&D 등을 위해 모여들 유인이 생기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재 융합캠퍼스 기업연구관에 들어와 있는 기업들은 스타트업 수준의 기업이 대부분이다. 실제 산업통상자원부가 실시한 실태 조사에 따르면 산학융합지구에 참여한 입주기업 중 사업체 규모가 10인 미만인 기업이 41.9%에 달했다. 10인 이상 50인 미만 기업은 36.5%로 그다음이다. 50인 이상 300인 미만 기업과 300인 이상 기업은 각각 16.2%, 5.4%에 불과했다. 한 산학융합원의 관계자는 “입주기업들은 주변 시세 대비 60~70%에 불과한 임대료를 노리고 들어온 스타트업이 대부분”이라며 “이들 기업은 자기 살기도 버겁다 보니 학생들에게 교육 목적의 인턴십 등 각종 산학연계 활동을 하기에는 여러모로 어려운 실정”이라고 지적했다.
이처럼 양질의 기업 참여가 부족한 것은 입주 메리트를 누리기에 현저하게 왜소한 캠퍼스 규모와 시대착오적인 규제 등이 영향을 미쳤다는 분석이다. 지역거점 캠퍼스로 불리지만 이전 대학교가 고작 한 곳에 불과한 곳도 적지 않고 무엇보다 이전한 학생과 교수진 규모가 일반 대학교 단과대학 수준(많아야 300~400명)에 불과하다 보니 기업 입장에서 구태여 융합캠퍼스 안에 기업부설연구소를 둘 이유가 없는 것이다.
◇제조시설 불허도 침체 이유=시대착오적인 규정도 기업들의 입주를 움츠러들게 하는 요인 중 하나다. 산업단지는 산업시설구역과 지원시설구역으로 구분된다. 현재 산학융합캠퍼스는 법규상 지원시설 구역에 속해 입주기업들이 제조업 허가를 공식적으로 받을 수 없다. 시제품 생산 및 판매가 안 되는 것이다. 유사한 사례로 대학 내 창업보육센터에 입주한 기업이 제조 및 생산활동이 가능한 점을 고려하면 불이익이 명확해 기업 유치에 걸림돌로 작용하고 있다는 게 산학융합원 측의 공통된 설명이다. 경기산학융합지구에 입주했던 한 기업 대표는 “기술 기반 기업들은 초기 단계일수록 도시형 공장 시스템을 도입해 연구 공간과 생산 제조시설을 통합 운영하는데 현재는 법적 제약으로 불가능해 제조시설을 판교에 별도로 두고 있다”며 “생산 효율성이 떨어져 불가피하게 사무실 전체를 옮길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고 푸념했다.
◇산학 생태계 조성에 대한 정책당국의 안이한 인식=애초에 이 사업을 구상하는 계획 단계에서 정책 결정권자들이 산학 생태계에 대해 단편적 인식에 머물러 있었던 것이 사태를 키웠다는 지적도 나온다. 정부와 지자체는 지역별로 최대 500억원에 달하는 상당한 규모의 지원을 했지만 결과적으로 자생 가능한 캠퍼스로 만들기에는 더 큰 투자가 필요했다는 의견이다. 무작정 지원금액을 늘릴 수는 없는 만큼 결국 지역별 안배라는 명목 아래 10여개의 지구를 조성하기보다는 ‘선택과 집중’을 통해 일부 지역에 한해 과감한 지원을 하는 게 필요했다는 것이다. 익명을 요구한 전북대 교수는 “적지 않은 국고 지원금을 받았지만 이 금액으로 할 수 있는 것은 허허벌판 상태인 땅을 매입해 건물을 지은 것이 전부”라며 “기업과 학생·연구자들이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는 교통 및 기숙사 등 주거시설, 상점가 등이 종합적으로 조성되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고 지적했다.
정부·지자체는 실적쌓기만 몰두
판박이 한국형 실리콘밸리 난립
산학융합지구 사업이 표류하고 있지만 문재인 정부 들어서도 각 부처는 물론 서울시 등 지방자치단체에서는 각종 캠퍼스형 산업단지 사업을 쏟아내고 있다. MIT와 스탠퍼드대 등을 표방한 ‘한국형 실리콘밸리 조성’이라는 명분으로 각종 정책이 난립하고 있다는 평가다.
교육부는 지난달 24일 국토교통부·중소벤처기업부와 ‘캠퍼스 혁신파크 조성을 위한 관계기관 업무협약’을 체결하기로 했다. 세 부처는 대학 내 유휴부지를 도시첨단산업단지로 지정해 기업·연구소와 주거·복지·편의시설을 짓는 ‘캠퍼스 혁신파크’ 조성 사업을 추진할 방침이다. 정부가 막대한 예산을 투입해 건물을 지어준 뒤 입주기업과 각종 산학협력 활동을 지원하는 게 목표로 산학융합지구와 차별성을 찾기 힘들다는 지적이 지배적이다.
특히 교육부는 이미 지난 2011년부터 총 14개 학교를 대상으로 캠퍼스 내 기업입주를 지원하는 산단캠퍼스 사업을 진행해온 만큼 예산 중복이라는 비판도 나온다. 올해부터는 이 사업의 후속으로 산학연 협력단지 사업을 신설해 오는 2023년까지 운영할 예정이다.
교육부에 따르면 산단캠퍼스 사업에 참여했던 학과의 전체 취업률이 14개 대학 평균취업률과의 차이가 1%포인트에 불과하는 등 사업성과가 저조하다는 비판도 받는 실정이다. 과거 사업에 대한 반성 없이 무작정 실적 쌓기용 사업만 만들어내고 있다는 비판이 나오는 이유다.
이 같은 논란에 교육부 관계자는 “기존 산단캠퍼스 사업은 기존 건물을 리모델링하는 ‘점 단위’ 개발이었다면 캠퍼스 혁신파크는 대학 내에 산업단지를 만드는 ‘면 단위’ 개발”이라고 해명했다.
서울시 등 지자체 역시 대학에 러브콜을 보내고 있다. 대학과 기초지자체(구청)가 함께 대학 주변에 창업공간을 조성하는 서울시 캠퍼스타운 사업이 대표적이다. 대학별로 4년간 100억원을 지원한다. 2017년 고려대를 시작으로 올해 광운대와 세종대·중앙대도 사업을 이어간다. 서울시는 2025년까지 총 10곳으로 확대할 계획이다. 대학 역시 이러한 기조에 적극 호응하고 있다. 오세정 서울대 신임 총장이 임기 중 대표 사업으로 스탠퍼드대를 벤치마킹한 ‘관악 AI 밸리’를 서울시와 추진하겠다고 공언한 게 대표적이다.
서울의 한 산학협력단 관계자는 “각 정부 부처는 물론 지자체까지 나서서 ‘대학과 사업할 거리가 없는지’ 자문을 구해오는 경우가 부쩍 늘었다”며 “몇 년 안에 웬만한 이름 있는 대학이면 모두 한국형 실리콘밸리 사업을 추진할 것이라는 우스갯소리가 현실로 다가오고 있다”고 꼬집었다. /박진용기자 yongs@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