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경제소사]1441년 세계 최초 측우기 제작

淸 연호탓 中하사품으로 오해

1837년 현종 때 만들어진 현존 유일의 측우기./사진제공=문화재청

‘호조에서 우량을 측정하는 일에 관해 아뢰다.’ 세종실록 96권, 세종 24년(1441년) 5월8일자 기사의 첫머리다. 새로 만들 측우기의 규격과 강우량 측정, 보급 방안을 보고받은 세종은 그대로 따랐다. 세계 최초의 측우기가 이렇게 만들어졌다. 이탈리아의 베네데토 카스텔리가 제작한 서양 최초의 우량계(1639년)보다 198년 빠르다. 고대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에서도 내리는 빗물의 양을 쟀다지만 문헌 기록과 유물을 기준으로 측우기는 조선이 세계 최초임이 분명하다.

농업국가인 조선에서 빗물은 중요한 자원이었으나 이전까지의 강우량 측정 방식은 주먹구구. 호미로 땅을 파 눈대중으로 측정하는 수준이었다. 세자(훗날 문종)의 건의와 세종의 결심으로 대량 보급된 측우기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등의 전란을 겪으며 유실되고 제도 자체까지 유명무실해졌으나 영조 46년(1770년) 어명으로 되살아났다. 영조 말년 이래 현대까지 우리가 갖고 있는 250여년의 강우 기록 역시 세계에서 가장 긴 기록자산이다. 세종대왕은 왜 측우기를 제작했을까. 공평한 조세 부담을 위해서다.


측우기와 관련된 세종 시대의 기록에는 ‘빗물의 양을 재 훗날의 전거(典據)로 삼는다’는 문구가 어김없이 등장한다. 토지의 비옥도와 풍작·흉작 정도에 따라 세액을 정하는 공법제(貢法制)가 뿌리내리는 데 필요한 도구의 하나로 측우기가 고안·제작됐다는 얘기다. 공법제 논의를 꺼낸 지 17년이 지나서야 제도를 도입한 세종은 투명한 세액 결정을 위한 측우기 도입·보급에 전력을 기울였다. 제도 시행에 오랜 시간이 걸린 것은 땅을 소유한 양반 지주층의 반대가 드셌던 탓이다. 착복을 원천적으로 봉쇄하는 투명한 조세 행정이 싫었던 것이다.

세계인들은 한국을 측우기를 처음 만든 국가로 알아줄까. 그렇지 않다. 왜곡 때문이다. 미국에서 공부한 중국 학자들의 주장이 정설로 통한다. ‘측우기는 중국이 발명했고 청나라 건륭제가 1770년 조선에 하사했다’는 것이다. 지난 1954년 학술지에 처음 발표된 이 주장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재인용되는 실정이다. ‘한국의 측우기가 중국 하사품’이라는 주장에는 근거가 있다. 측우기에 ‘乾隆庚寅五月造(건륭경인5월조·1770년 5월 제작)’라고 새겨져 있기 때문이다.

사대주의의 그림자가 참으로 짙다. 남의 나라 연호에 기댄 역사는 시대 왜곡을 넘어 후손에게까지 짐을 지운다. 문득 의문이 든다. 세종에게 반대했던 기득권층이 이제는 사라졌는지, 지금은 사대주의에서 자유로운지.
/권홍우선임기자 hongw@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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