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테와 함께 독일 고전주의 문학을 대표하는 쉴러의 마지막 희곡 <빌헬름 텔>을 바탕으로 하는 이 오페라는 13세기 초 오스트리아의 지배를 받던 스위스를 배경으로 독재자의 횡포와 만행에 굴복하지 않고 이에 맞서 싸우는 인물 윌리엄 텔과 스위스 민중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100년 전 일제 치하에서 대한민국의 독립을 위해 저항하던 3.1운동의 정신과 일제에 조직적으로 항거하기 위해 수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이념을 떠올리게 하는 대목이다. 오페라 <윌리엄 텔>은 1829년 파리 오페라극장에서 처음으로 초연되었다. 긴 공연 시간과 배역의 기교적인 어려움으로 인하여 세계 무대에서도 자주 만나기 힘든 작품이다. 국립오페라단은 2019년 역사적인 해를 맞아 파리 초연 이후 190년 만에 드디어 한국 오페라 무대에 <윌리엄 텔>을 올린다.
로시니가 마지막으로 작곡한 오페라인 <윌리엄 텔>은 이탈리아 오페라의 전통을 계승하면서도 프랑스의 그랑 오페라스타일이 합쳐진 독특한 작품이다. 히 초등학교 교과서에 실릴 만큼 친숙한 <윌리엄 텔> 서곡은 단 12분짜리지만 네 부분으로 구성되어 오페라의 전체 줄거리를 함축적으로 보여준다(프렐류드 : 동이 틀 무렵 - 폭풍우 - 목가 - 피날레 : 스위스 군인들의 행진). 고요하고 평화로운 스위스의 전원 풍경과 역경을 뚫고 승리를 쟁취하는 기쁨에 찬 민중의 모습을 음악적으로 섬세하게 묘사되어 있다.
국내초연 국립오페라단 <윌리엄 텔>의 시대적인 배경은 윌리엄 텔의 전설이 탄생한 13~14세기가 아니라 우리나라에서 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난 1919년으로 설정된다. 불가리아 출신의 연출가 베라 네미로바는 “불가리아 역시 비슷한 역사적 경험을 가지고 있기에 이번 공연의 취지에 더 깊이 공감할 수 있었다”며 이번 연출의 핵심을 “모든 민족은 자신들만의 윌리엄 텔이 있다”라는 문장으로 일축한다.
로시니의 오페라와 쉴러의 희곡 [빌헬름 텔]에 나오는 13세기 오스트리아의 독재와 지배에 대항하는 스위스 민중들은 100년 전 일제의 폭정에 온 힘을 다해 저항하던 우리 선조의 모습이며 부당한 권력과 폭력에 저항하는 인간의 보편적 의지와 자유에 대한 갈망을 상징한다. 디자이너 옌스 킬리안이 맡은 무대는 스위스의 평화로운 산과 호수를 암시하는 아름답고도 추상적인 이상(utopia)의 공간으로 꾸며진다. 이 아름답고 평화로운 세계는 극의 흐름과 상황에 따라 여러 개의 벽면으로 분할되며 왜곡되거나 깨진다. 이를 통해 압제자들의 폭력적인 행위가 한 개인을, 나아가 민족의 자유와 인간성, 인권을 어떻게 상처 입히는지를 보여준다.
이 작품의 최고 하이라이트라고 할 수 있는 장면, 바로 아들의 머리에 놓인 사과를 향해 윌리엄 텔이 활시위를 당기는 장면은 무대의 막이 오를 때까지 비밀에 붙여진다. 연극에 기반을 두면서 독창적인 스타일로 20세기 오페라 연출의 역사에 큰 획을 그었던 루트 베르크하우스와 페터 콘비취니의 수제자인 연출가 네미로바는 비장하고 모던한 연출로 이 장면의 극적인 묘미를 살리면서도 한국 청중들의 공감을 살 수 있도록 유쾌한 상상력을 더할 예정이다.
2019년 국립오페라단의 <윌리엄 텔>은 2018년 국립오페라단의 <마농>으로 호평을 받은 마에스트로 제바스티안 랑 레싱이 다시 지휘봉을 잡는다. 2012년 프랑크푸르트 오페라 <니벨룽의 반지>와 2017년 잘츠부르크 부활절 페스티벌 <발퀴레> 연출로 최근 유럽 오페라 극장에서 각광받고 있는 연출가 베라 네미로바가 연출을 맡고, 무대와 의상 디자인은 옌스 킬리안이 담당한다. 인간적인 고뇌와 분노에 휩싸이면서도 강인함과 따뜻함을 표현하는 주인공 텔 역은 바리톤 김동원과 김종표가 맡고 테너가 낼 수 있는 가장 고음인 하이C음을 28번 이상 소리 내야 하는 고난도의 테크닉을 요하는 아르놀드 역으로는 세계적인 테너 강요셉과 독일 브레멘 극장 전속가수로 활동 중인 테너 김효종이 무대에 선다.
아르놀드와 금지된 사랑에 빠지는 마틸드 역은 소프라노 세레나 파르노키아와 정주희가 맡아 열연한다. 윌리엄 텔의 아내 헤트비히 역은 메조 소프라노 백재은이 맡고 윌리엄 텔의 아들 제미 역은 소프라노 라우라 타툴레스쿠와 구은경이 맡는다. 그 외에도 김요한, 김철준, 전태현, 김성진, 안대현, 손지훈 등 한국 오페라 무대를 이끌고 있는 정상급 성악가들이 함께 무대에 오른다. 웅장한 합창, 대규모의 군중장면이 작품의 전반을 이끌어가는 이번 공연에는 국립합창단과 그란데합창단이 함께 무대에 올라 대작의 전율을 선사한다. 연주는 코리안심포니오케스트라가 맡는다.
/정다훈기자 sestar@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