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 백남준을 만나다]기마민족 기상 담은 '전자 초고속도로'...동서 융합을 꿈꾸다

<9>백남준과 베니스비엔날레
1993년 하케와 더불어 독일관 작가로 뽑혀
마르코 폴로·단군·칭기즈칸·알렉산더 등
동서양 주름잡은 역사적 인물 로봇으로 제작
전시관 건물 외부·주변 에워싸며 작품 설치
한국인 최초로 대상 '황금사자상' 수상 영예
1966년엔 첼리스트 샬롯 무어만과 함께
배 위서 음악 연주하는 퍼포먼스 펼치기도

1993년 베니스비엔날레 독일관 작가로 참여한 백남준이 작품 ‘마르코 폴로’ 설치를 마친 후 사진촬영을 하고 있다. /사진제공=박영덕

“베니스는 자동차를 폐기한 이후 이 세상에서 가장 진보적인 도시가 됐다”

수상 도시인 이탈리아 베니스는 배가 택시이자 버스로 자동차 역할을 대신한다. 자연환경 때문에 자동차를 버릴 수밖에 없었던 베니스에 대해 미국의 전위적 음악가 존 케이지(1912~19992)는 1958년 이같이 적었다. 위로 아닌 찬양이었다. 백남준은 베니스와의 첫 인연에서 바로 이 문장을 인용했다.

‘백남준과 베니스’라고 하면 1993년 베니스비엔날레 황금사자상 수상이 제일 먼저, 가장 많이 언급된다. 그러나 백남준과 베니스비엔날레의 인연은 그보다 훨씬 앞선 1966년에 시작된다. 백남준과 그의 예술적 동지였던 첼리스트 샬롯 무어만은 그 해 베니스비엔날레 기간에 맞춰 뉴욕에서 이탈리아로 날아갔다. ‘곤돌라 해프닝’을 기획했다.

물의 도시 베니스를 상징하는 날렵한 배 곤돌라 위에서 음악을 연주하며 퍼포먼스를 진행하기로 했다. 행사를 알리는 전단지에 백남준은 존 케이지가 쓴 1958년의 이 문장을 인용했다. 무어만이 배 위에서 케이지의 음악을 연주했으니 케이지는 의도하지 않았음에도 이 프로젝트에 연루됐다. 이어 백남준이 생상의 음악을 연주하는 동안에 무어만이 바다에 뛰어들었다. 수백 년 오염된 베니스의 바닷물에 들어갔다 나온 무어만은 공연 후 꽤 오랫동안 피부발진에 시달렸다.

그로부터 27년 후, 독일 부퍼탈에서 1963년 백남준의 첫 개인전이 열린 지 30년 만인 1993년에 백남준은 베니스비엔날레에 정식으로 초청됐고 최고상인 황금사자상을 품에 안았다. 우선 베니스비엔날레가 무슨 행사인지, 어떤 의미를 갖는지 짚어보자. ‘비엔날레(biennale)’는 2년에 한 번씩이라는 뜻으로, 베니스비엔날레는 베니스에서 격년으로 열리는 국제 예술제를 가리킨다. 1895년 당시 이탈리아의 국왕 움베르토1세와 왕비 마르게리타의 결혼 25주년인 은혼식을 축하하기 위해 열린 ‘베니스 국제 미술전’이 시작이었다. 미술계의 경향변화를 감지하려면 2년에 한 번 여는 게 적합하다는 판단에 비엔날레로 자리 잡았다.

‘베니스의 상인’을 탄생시킨 도시답게 동시대 미술품에 대한 시장 창출도 설립 목적 중 하나였다. 작가를 더 효율적으로 소개하려는 욕구가 커졌다. 여기에 당대 유행하던 제국주의가 맞물려 ‘국가관’ 건립이 시작됐다. 공원이라는 뜻의 자르디니(Giardini)에 1907년 벨기에를 시작으로 국가관이 들어섰다. 미술을 앞세운 제국주의 대리전 양상으로 전개돼 나라별 영향력에 비례한 규모로 국가관이 조성됐다. 자국이니 이탈리아관이 가장 크고 독일과 영국·프랑스가 공원 안쪽 가운데 목 좋은 자리를 차지했다. 베니스비엔날레는 국가관 전시로 자국 미술을 대표하는 ‘미술계의 올림픽’이 됐다. 이후 상업적 역할은 ‘아트페어(Art Fair)’로 옮겨가고 ‘비엔날레’는 동시대 미술의 최신 경향성과 실험성을 보여주는 국제행사로 자리 잡았다. 그 중에서도 가장 오랜 역사와 높은 권위를 자랑하는 것이 124년 전통의 베니스비엔날레이다.

백남준 ‘스키타이 왕, 단군’ 1993년 베니스비엔날레 당시 독일관 외부에 바다를 향해 서있는 모습으로 설치됐다. ⓒRoman Mensing /서울경제DB

백남준은 1993년에 독일관 작가로 뽑혔다. ‘뮌스터 조각프로젝트’의 창립자로 독일 현대미술에 획기적 영향을 준 클라우스 부스만(1941~2019)이 전시감독을 맡아 독일의 개념미술가 한스 하케(83)와 더불어 백남준을 참여작가로 지목했다. 파격이었다. 백남준은 7년 정도 독일에서 공부하기는 했으나 한국인이고 뉴욕에 살면서 미국 여권을 사용하는 사람이었다. 한스 하케는 독일 태생이기는 하나 미국에 거주했으며 걸핏하면 나치즘을 문제 삼는 ‘자국 비판적’ 작가였다. 부스만은 독일 여론과는 상관없이 ‘빅픽처’를 그리고 싶었다. 독일 통일 후 처음으로 통독 단일관으로 꾸리는 전시를 독일의 역사 뿐 아니라 세계적 통합의 주제로 풀어보고자 했다.

백남준은 자신을 선정한 부스만에게 물었다.

“나를 선정해 주어서 무척 영광이다. 그런데 독일같이 큰 나라에서 어떻게 나같이 작은 한국인을 뽑을 생각을 했나요? 나에게는 독일 패스포트도 없는데. 게다가 이번 비엔날레는 독일 통일 후 첫 전시라서 보통 같으면 동독출신 작가 한 명과 서독출신 작가 한 명을 선정해서 참가시킨다는 생각을 할텐데.”

백남준의 질문은 대범했고 부스만의 대답은 대단했다.

“만약 동쪽에서 한 사람을 택한다면 아예 아주아주 먼 동쪽인 극동지역 작가로 독일에 거주했던 한국인을, 그리고 한때 동독에서 살다가 아주 아주 서쪽인 현재 미국에서 살고 있는 독일작가를 선정하는 것이 좋다.”


백남준 ‘칭기즈칸의 복권’. 1993년 베니스비엔날레 때 선보인 작품이다. /사진제공=백남준아트센터

독일관은 영국관 옆에, 프랑스관과 인접한 곳에 자리 잡고 있다. 캐나다관이나 아시아국가 유일의 일본관보다는 규모가 크다. 건물 뒤편 숲 사이로 탁 트인 아드리아해를 볼 수 있는 곳이다. 백남준은 일찍이 1974년 고안한 ‘전자 초고속도로(Electronic Super highway)’를 주제로 대형 TV 설치작품을 준비했다. ‘베니스에서 울란바토르까지’라는 부제를 달았고 유라시아를 호령하던 기마민족의 기상으로 동서양 교류와 융합을 이야기했다.

한스 하케가 독일관 내부를 차지하고 백남준이 건물 외부 및 주변을 에워싸며 작품을 설치했다. 나치즘을 비판해온 하케는 히틀러가 개축한 독일관 바닥을 다 뜯었고 뒤집어 엎었다. 히틀러의 흔적을 제거하는 그 자체가 작품이었다. 관객은 뒤집힌 바닥을 조심스레 다니며 감상(?)해야 했다. 전시장 흰 벽에는 히틀러가 독일제국을 꿈꾸며 베를린에 설계하려던 도시 ‘게르마니아(Germania)’라고 적었다. 플라스틱으로 커다랗게 만든 1마르크 동전을 정문 위에 얹었다. 정치와 자본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예술의 종속성을 꼬집으며 역사를 직시하게 했다.

묵직하고 정적인 하케의 작품과 달리 백남준의 작품은 요란법석이었다. 독일관 앞마당에는 클래식 자동차와 모니터로 이뤄진 TV로봇 ‘마르코 폴로’를 설치했다. 베니스에서 태어나 동방여행을 떠난 마르코 폴로는 동서양을 넘나든 대표적 인물이다. 폭스 바겐 뉴비틀의 엔진 자리를 꽃으로 가득 채웠다. 6대의 TV로 이뤄진 몸통은 동서양의 건축물과 각종 추상이미지로 채워졌다. 얼굴과 발 자리에는 붉은 네온으로 상형문자를 적었다.

건물 뒤쪽 바다를 향한 자리에는 오른손에 창을 든 로봇 ‘스키타이 왕, 단군’을 세웠다. 백남준은 단군을 한민족의 시조이자 기마민족의 기상을 마음껏 펼친 한국 샤먼의 원조로 봤다. 유라시아를 호령한 ‘칭기즈칸의 복권’을 비롯해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 대왕’, 러시아의 ‘캐더린 대제’ 등 동서양을 가로지르며 자신의 영역을 확장한 역사적 인물들을 로봇으로 제작해 선보였다.

백남준 ‘알렉산더 대왕’. 1993년 베니스비엔날레 때 선보인 작품으로 지난해 5월 크리스티 경매에서 약 6억2,000만원에 낙찰됐다. /사진제공=Christie‘s

로봇 설치작품에는 전기 공급이 필수다. 문제는 도시 전체가 15세기 유적인 베니스에서는 땅을 파거나 못을 박는 일체의 행위가 금지된다는 사실이다. 꼭 필요한 경우에는 문화재 관리 당국의 검토를 거쳐 허가를 받아야 한다. 전기 배선을 위해 곡괭이로 땅을 팠더니 자르디니 공원 관리인이 기겁하며 달려왔다. 백남준과 그의 동료들은 일단 물러나는 ‘척’ 했다. 관리인이 못 보는 틈을 타 조금씩 땅을 팠고 눈에 띄지 않게 낙엽으로 그 위를 가려두는 식으로 몰래 배선작업을 진행했다. 개막식 날 로봇과 TV에 일제히 불이 켜지자 관리인은 “어떻게 전기가 들어온 거야?”라며 희번덕거렸지만 되돌리기에는 이미 늦었다.

백남준은 가급적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작품을 경험하고 즐기기를 바랐다. 음악은 관객들을 끌어들이는 효과적이다. 백남준은 “사람들 몰려오게 소리 좀 높이라”고 주문했다. 음량이 커지자 제일 먼저 쫓아온 이는 영국관 직원이었다. 시끄러워 전시에 방해가 되니 소리를 줄여달라는 요청이었다. 일단 볼륨을 낮춘 백남준은 그 직원이 영국관으로 들어가기를 지켜보다 다시 소리를 크게 했다. 몇 날에 걸쳐 실랑이가 계속됐다. 백남준이 원하는 만큼의 쩌렁쩌렁한 사운드는 아니었지만 영국관 관계자들이 참아주는 수준에서 타협점을 찾았다. 아무튼 음악과 소리를 따라 사람들은 기대 이상으로 모여들었다.

일반적으로 관람객은 전시장 내부에 집중하고 나가버리는 경향이 있으니 백남준은 ‘이 쪽에 작품이 더 있다’는 사실을 알리고도 싶었다. 화살표를 그려 나무에 걸기 위해 못질을 하다 또 관리인의 잔소리를 들었다. 결국엔 사다리 위에 세워두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미술관 뒤쪽 숲에 자신의 골동 수집품을 널어두는 것도 백남준의 작업 계획이었으나 ‘비가 내려 금속에서 나온 오염 물질이 나무를 해치면 어떻게 하느냐’는 지적을 받고 치워야 했다. 아쉬움을 담아 몇 개의 골동품을 내놓는 것으로 마무리됐다.

백남준 ‘캐더린 대제’ 1993년 베니스비엔날레 때 선보인 작품이다. ⓒRoman Mensing /서울경제DB

백남준의 협업 엔지니어 이정성 씨는 건물 외곽으로 둘러 다니며 작업하는 시간이 아까웠다. 지름길인 건물 안쪽으로 가로질러 다니다 한스 하케와 싸우기도 했다. 그가 오간 흔적대로 ‘길’이 나버렸기 때문이다. “바닥을 뒤엎어 놓은 작품인데, 작품 위로 자꾸 다니면 어떻게 하느냐”는 하케의 지적을 나무랄 수는 없지만 다니지도 못하게 문을 막아버린 것은 야속했다.

이처럼 백남준은 구상하는 작업 방향과 작품 완성도, 관객과의 소통을 위해서는 물불 가리지 않는 작가였다. 도발적이고 과감했다. 하지만 동양의 고유한 가치관을 부정하거나 전복시키는 사람은 아니었다. 독일관 작품 설치가 한창이던 어느 날 아침, 백남준은 조수들 중 유일한 한국인인 이정성을 밖으로 불러냈다.

“부처 목을 쳐야 해. 불상 목을 잘라 나무에 매달 생각이야. 불경스러우니 미스터 리, 네가 하면 안 돼. 하지만 부처 목 자르는 건 나도 보기 싫다. 불상과 상관없는 미국 애들한테 머리 자르라고 시켜 놓고, 우리는 잠깐만 피해 있자. 얼른, 나가자.”

백남준은 일찍이 피아노와 바이올린을 때려 부쉈고, 넥타이와 양말을 자르는 퍼포먼스를 펼쳤다. 그의 파괴적 행위는 과거를 잘라내고 그 위에 새로운 미래를 만들어간다는 의미를 품고 있다. 부처라는 관념에 집착하지 말고, 부처를 만나면 오히려 부처를 죽이라는 ‘살불살조(殺佛殺祖)’의 정신과도 맞닿아 있다. 백남준은 잘린 불두(佛頭)를 거꾸로 매달고 그 아래로 불상의 몸이 나뒹굴게 했다.

작품으로 시대를 앞서가고 세계를 포용하는 것과는 별개로 ‘인간 백남준’은 불경한 행동을 조심스러워하고 금기시되는 일을 꺼리던 ‘옛날 사람’의 마음을 갖고 있었다. 작업은 해야겠는데 마음은 불편하니 어쩔 수 없이 동양사상이나 불교와는 상관없는 서양인 동료들의 손을 빌렸던 것이다. “불상 목 자르는 건 안 볼래”라며 자리를 비킨 백남준의 착한 심성을 부처도 알았을 듯하다. 이 1993년 베니스비엔날레에서 백남준은 한국인 최초로 대상인 ‘황금사자상’을 수상했다.
/베니스=조상인기자 ccsi@sedaily.com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