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28년 만의 국제축구연맹(FIFA) 월드컵 4강 진출을 이뤘던 잉글랜드가 올해도 축구로 행복해하고 있다. 유럽축구연맹(UEFA)이 주관하는 2대 대항전의 결승 2경기가 모두 잉글랜드 클럽끼리의 대결로 치러지기 때문이다. 월드컵은 국가대항전의 최고 무대, UEFA 챔피언스리그와 유로파리그는 유럽 클럽대항전의 최고 경연장이다.
아스널은 10일(이하 한국시간) 스페인 발렌시아와의 유로파 4강 2차전 원정에서 4대2로 이겼다. 1·2차전 합계 7대3으로 결승에 오른 것이다. 첼시도 결승에 갔다. 1차전에 이어 2차전에서도 독일 프랑크푸르트와 1대1로 비겨 승부차기까지 갔고 4대3으로 이겼다. 아스널과 첼시의 결승은 오는 30일 아제르바이잔 바쿠에서 열린다. 앞서 챔스 결승은 토트넘과 리버풀의 대결로 결정됐고 다음달 2일 스페인 마드리드에서 펼쳐진다. 챔스와 유로파 결승 진출팀이 모두 한 국가의 리그에서 나온 것은 사상 처음이다.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EPL)는 1984년 이후 35년 만에 챔스와 유로파 우승팀을 동시에 배출하게 됐다. 35년 전에는 챔스에서 리버풀이, 유로파에서 토트넘이 우승했다.
최근 5년간 챔스·유로파 결승 대진을 보면 스페인팀 11번, 잉글랜드팀 3번, 이탈리아팀이 2번 진출해 스페인 프리메라리가의 초강세가 계속됐다. 그러나 올해는 레알 마드리드가 16강, FC바르셀로나가 4강에서 미끄러지면서 ‘EPL 잔치’가 벌어졌다. 뉴욕타임스(NYT)는 10일 “잉글랜드 클럽이 6년 연속으로 유러피언컵(챔스 전신) 정상을 지키던 1970년대 말부터 1980년대 초를 떠오르게 한다”고 보도했다.
‘축구는 감독놀음’이라는 말처럼 EPL의 눈부신 발전은 감독의 역량에서 찾을 수 있다. 토트넘의 마우리시오 포체티노(아르헨티나), 리버풀의 위르겐 클롭(독일), 아스널의 우나이 에메리(스페인), 첼시의 마우리치오 사리(이탈리아)까지 결승에 오른 4팀 감독이 모두 외국인이다. 첼시 코치인 이탈리아 출신의 잔프랑코 졸라는 스카이스포츠이탈리아와의 인터뷰에서 “4명 감독과 지난해 맨체스터 시티를 EPL 정상에 올려놓은 펩 과르디올라 등은 유럽을 넘어 세계적으로도 톱 레벨이다. 이들이 제시하는 새로운 아이디어와 전술이 EPL 특유의 공격성과 템포, 투지와 결합해 아주 훌륭한 결과물을 만들어내고 있다”고 평가했다.
NYT도 “스페인·이탈리아·독일·프랑스 등에서 몇 번씩 우승을 이끌고 챔스 또는 유로파에서도 뚜렷한 성적을 낸 경험 많은 감독들이 언젠가부터 EPL로 몰려드는 추세”라고 했다. EPL팀들은 선수만큼 감독 대우에 후하다. 영국 언론에 따르면 과르디올라의 연봉은 1,500만파운드(약 229억원)에 이른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는 ‘초보감독’ 올레 군나르 솔샤르에게도 약 107억원의 연봉을 안긴 것으로 전해졌다. 축구장 밖 생활과 자녀교육 등 환경적인 유인으로도 잉글랜드는 선호도가 가장 높은 행선지 중 하나다.
EPL의 TV 중계권료 배분도 새삼 주목받고 있다. EPL은 TV 중계권료 수입 중 50%는 전체 20개 팀에 균등 배분하고 25%는 성적에 따라 차등 지급한다. 나머지 25%는 홈경기 중계 횟수에 따라 나눠준다. 가디언에 따르면 지난 시즌 우승팀 맨시티는 중계권료와 스폰서십 등으로 1억4,900만파운드(약 2,281억원)를 챙겼다. 엄청난 액수지만 꼴찌 웨스트브롬도 9,500만파운드(약 1,454억원)를 받았으니 그리 놀라운 숫자도 아니다. EPL은 우승팀의 수입이 꼴찌의 1.6배 수준으로 다른 리그에 비해 차이가 크지 않다. 일단 EPL에 머물면 돈벼락이 보장되니 어떤 팀이든 강등을 피하려 사력을 다한다. 그래서 강팀들도 자칫하면 약팀에 덜미를 잡힌다. 방심할 여유가 없다. 이렇게 리그 안에서 기른 경쟁력이 리그 밖 챔스나 유로파에서도 통했다는 분석이다.
스페인도 EPL의 방식을 따르고 있다. 중계권 시장이 구단별 계약 방식이라 인기팀에만 돈이 몰리는 구조였다가 2016~2017시즌부터 제도를 손봤다. 포브스에 따르면 2014~2015시즌에는 전체 수입의 38%가 레알과 바르셀로나에 돌아갔으나 현재는 그 비중이 23%로 줄었다. 최근 5년간 매번 챔스 우승팀을 배출하고 유로파도 4번 우승했던 스페인은 쓰라린 상처로 잊지 못할 한 해를 보내게 됐다. 올 시즌 크리스티아누 호날두를 이탈리아 유벤투스로 떠나보낸 레알의 부진이 가장 아쉽다. 독일 분데스리가를 대표하는 바이에른 뮌헨은 16강에서 탈락했다. 노쇠한 로베리 듀오(아르연 로번-프랑크 리베리)와 최근 작별을 선언한 뮌헨은 대대적인 리빌딩을 예고하고 있다.
이탈리아 세리에A는 유벤투스·AC밀란·인테르밀란·AS로마는 물론이고 파르마·피오렌티나·라치오까지 ‘7공주’가 리그 정상을 다투고 챔스·유로파 우승컵도 심심찮게 들어 올리던 그때 그 시절이 그리울 만하다. 1980년대 후반부터 2000년대 중반까지다. 이탈리아는 유벤투스의 2부 강등으로까지 이어진 2006년의 부패 스캔들 이후 2010년 인테르밀란의 챔스 제패가 마지막 유럽대항전 우승이다.
/양준호기자 miguel@sedaily.com